■ 한일수교 60년… 새로운 미래 위한 다섯번의 대화

(3) 언어학자·출판인의 만남 - 우리는 한본인(韓本人)입니다

최근 일본 도쿄 진보초에 위치한 한국문학 전문서점 책거리에서 김승복(왼쪽) 쿠온 출판사 대표와 노마 히데키 전 도쿄외국어대 교수를 만났다. 두 사람은 ‘새로운 K’가 한일관계의 가장 큰 가능성을 품고있다고 말한다.
최근 일본 도쿄 진보초에 위치한 한국문학 전문서점 책거리에서 김승복(왼쪽) 쿠온 출판사 대표와 노마 히데키 전 도쿄외국어대 교수를 만났다. 두 사람은 ‘새로운 K’가 한일관계의 가장 큰 가능성을 품고있다고 말한다.

도쿄=글·사진 신재우 기자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일본이 왜 열광하지 않은 줄 아세요? 일본은 이미 ‘새로운 K’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노마 히데키·이하 노마)

“‘새로운 K’에 대한 국경 없는 감수성의 중심에는 ‘덕질’이 존재해요. 지금의 생활형 교류가 K의 핵심이자 가능성이죠.”(김승복·이하 김)

노마 히데키 전 도쿄외국어대 교수와 김승복 쿠온 출판사 대표. 두 사람은 202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한본인’(韓本人)의 시초격이다. 도쿄교육대 예술학과를 나와 미술가로 활동하다 한국어에 매료돼 30세에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해 일본에서 가장 깊이 있게 한국어를 연구해온 노마 교수, 30여 년 전 일본으로 건너와 한국문학 전문출판사와 서점 책거리를 열고 10년에 걸쳐 박경리의 ‘토지’를 일본어로 완역·출간한 김 대표. 일본에 발붙이고 있는 이들에겐 K-감수성이 흐른다. K-팝과 K-드라마 열풍 속에서 한글과 일본어를 합성한 ‘야바인데’(위험해를 의미하는 일본어 ‘야바이’+한국어 종결어미 ‘-데’) 같은 ‘한본어’ 표현이 유행했다면, 이제는 언어를 넘어 생활과 취향, 정서 자체가 섞인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 시대다.

김 대표와 노마 교수가 말하는 새로운 K는 무엇인가. ‘팬’이자 ‘소비자’인 한본인을 중심으로 한 K는 현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강 작가의 말을 빌려 묻게 된다.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나아가 ‘K-’는 끝내 한·일의 과거를 구할 수 있을까. 질문을 안고 최근 도쿄 진보초 책거리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일본엔 케데헌 열풍이 없다?!

K-콘텐츠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는 건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K-팝 아이돌은 일본 콘서트계 상징인 도쿄돔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K-드라마는 한국어 공부 열풍을 촉발했다. 이후 K-화장품, K-문학까지 영역은 넓어졌다. 그런데 정작 글로벌 넷플릭스 1위를 휩쓴 ‘케데헌’만큼은 일본에서 반응이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두 사람은 이를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로 읽어냈다. 노마 교수는 “‘K-’를 바탕으로 한 기초적인 문화 요소가 이미 일본 사람들에게 익숙하다는 증거”라며 “서양권에서 하나하나 신기한 요소인 음식·의상·노래가 일본 사람들에겐 이미 자기 문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여기에 동의하며 ‘새로운 K’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콘텐츠를 동시적으로 소비하면서 양국이 언어를 넘어 ‘감정 코드’로 연결돼 있어요. 교류의 축이 ‘전달’에서 ‘순환’으로 옮겨간 거죠.”

김 대표가 언급한 ‘생활형 교류’에서도 희망은 엿보인다. 일본에선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원서로 읽고 싶어 한글을 배우고, 한국에선 J-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극장가를 찾는다. 이제는 자연스럽고 동시에 ‘힙’한 이 양국의 문화를 즐기는 주체는 “좋아서, 궁금해서, 닮고 싶어서” 스스로 다가오는 이들이다. “애정이 인식의 출발점이자 지속의 동력이죠. 일본인들이 한국 콘텐츠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고, 한국인들이 일본 작품을 보며 환호할 때, 그 감정의 교류가 오늘날 한·일 문화 교류의 새로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마 교수는 이 감정의 교류가 한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찍이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한글을 ‘기적의 문자’라고 명명한 그는 “제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즉 언어제국주의와 무관하게 생겨난 한국어와 한글을 함께 쓰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처럼 침략과 수탈의 역사 속에서 세력을 확장한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권의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공유하며 확산하는 언어가 된 사례는 한글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코리아네스크 VS 자포니즘

노마 교수는 지금의 K를 가리키는 말로 ‘코리아네스크(Korea-nesque)’라는 표현을 꺼내 들었다. 19세기 서구에서 일본 사조를 향한 동경을 뜻했던 ‘자포니즘(자포네스크)’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그는 “21세기 코리아네스크는 자포니즘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선을 그었다. “자포네스크가 ‘일본에서 세계로’ 일방향으로 수직 확산하는 구조였다면, 코리아네스크는 세계와 한국이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구조입니다. K-팝에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다원성과 다양성, 다문화성이 핵심이에요. 자포네스크가 신기한 이국 취미를 넘어서지 못했다면, 코리아네스크는 이미 일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세계적 공유를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코리아네스크의 장에서는 ‘한국인’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걸그룹 블랙핑크의 리사는 태국인이지만 K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고, 그래미 어워즈 신인상 후보에 오른 캣츠아이 멤버 6명 중 5명은 외국인이다. 세계적인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블랙핑크 로제와 함께 ‘아파트’를 부르면 그 순간은 자연스럽게 K-팝의 일부가 된다. 김 대표는 이 코리아네스크를 ‘국경 없는 감수성’이라고 풀이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K-팝을 들으면서 ‘이게 한국 노래야?’라고 묻지 않아요. 국경 없는 감수성을 가진 세대이고, 국가의 논리보다 작품의 진정성에 반응하죠.”

◇K는 과거사를 극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역사적 상처를 안은 한·일 관계에서 K는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노마 교수의 첫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표면적으로는 고조됐다가 수그러들었다가 하면서 혐오 정서 같은 것이 존재하는 법이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바로 지적 세계로의 확장이다.

김 대표는 그 방법으로 ‘공동 창작’을 제안했다. 그는 “서로의 책을 번역하고, 창작의 현장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문화의 형태”라며 “그렇게 된다면 이 열풍은 지금이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마 교수가 쿠온 출판사를 통해 엮은 ‘한국의 진선미 3부작’도 이러한 시도로 읽힌다. 한·일의 지식인과 문화인 약 350명이 참여해 한국의 마음과 아름다움, 지성을 논한 기획은 새로운 K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래야 합니다. 다만 지금의 열광을 지적인 영역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열광, 저 열광을 따로따로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고 끝내 버리면, 문화로서의 큰 힘이 되기 어렵습니다. 지적 세계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노마)

■약력

김승복

△출판강국 일본에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쿠온을 설립하고 한국 책을 소개하고 있다. 한강과 김혜순 작품의 판권을 다수 확보하고 있으며, 박경리의 ‘토지’ 일본어 완역으로 한·일 양국에서 수상했다.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언어학자, 전 도쿄외국어대 교수. 2010년 ‘한글의 탄생’으로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 주시경학술상 등 수상.‘K-POP 원론’을 쓰고 한·일 예술인, 지식인들과 함께 ‘한국의 진선미 3부작’을 완성했다.

문화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신재우 기자
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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