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정부가 지난달 25일 국가공무원법 제정 76년 만에 ‘복종의 의무’ 폐지안을 입법예고 했다. 그 배경에는 1년 전의 ‘12·3 비상계엄’ 사태가 있다. 당시 헌법적 정당성이 결여된 계엄 포고령으로 일선 공무원들은 법치와 상명하복 사이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위법한 지시임에도 ‘복종 의무 때문에 거부 명분이 없다’며 머뭇거렸던 그날의 트라우마는,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악(惡)의 평범성’이 공직사회에도 발현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 실무자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악은 거창한 것이 아닌, 자신이 수행하는 명령의 의미를 성찰하지 않는 ‘무(無)사유’ 속에 깃든다고 통찰했다. 12·3 사태 당시 목격한 것 역시 악한 본성이 아닌, 시스템에 길든 ‘성실한 무사유’의 위험성이었다.
이번 법 개정은 공무원에게 헌법 가치에 부합하는지 ‘생각할 의무’를 돌려주는 역사적 작업이다. 그러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직론의 대가 앨버트 허시먼은 저서 ‘이탈, 항의, 충성’에서 조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구성원의 선택지는 ‘이탈’과 ‘항의’ 두 가지라고 했다. 위법한 명령 앞에 우리 공무원들의 선택지는 침묵과 이탈 뿐이었다. 합법적 ‘항의’ 통로가 막혀 있어서다. 허시먼의 이론에 따르면, 항의할 수 없는 조직에서의 ‘충성’은 비겁한 침묵이나 맹목적 복종으로 변질될 뿐이다.
하지만 복종 의무 폐지가 만능열쇠는 아니다. 현장에는 ‘위법·부당·재량’을 판단하기 어려운 회색지대가 있다. 공무원들이 자의적으로 상부 지시를 거부한다면 행정 기능이 마비될 수 있고, 공무원의 명령 거부권이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는 도구로 변질될 위험도 있다. 특히, 특정 정치 성향의 공무원 집단이 선출된 권력의 정책을 조직적으로 거부할 경우, 민주적 통제 원리의 훼손과 또 다른 형태의 ‘관료 정치’가 우려된다.
따라서 부작용의 최소화와 합리적인 ‘항의’ 통로를 열어주기 위해 독일의 ‘주구권(奏求權·합법적 이의제기권)’ 제도에 주목해야 한다. 나치 정권 관료들의 맹목적 복종을 반성하며 만든 독일 연방공무원법은 공무원에게 위법한 명령에 대해 공식 항변할 의무를 준다. 명령의 위법성이 의심되면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상급자가 이를 유지하면 더 높은 상급자에게 재보고하며, 그래도 명령이 유지되면 서면으로 지시를 요구한 뒤 이행한다. 이로써 책임은 명령권자에게 귀속되고 실무자는 면책된다.
독일식 모델은 사회심리학자 톰 타일러가 강조한 ‘절차적 정당성’을 제도화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법을 따르는 것은 처벌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이 공정하다고 믿을 때라고 했다. 명령을 거부해도 자신이 다치지 않는다는 ‘심리적 안전판’과 행정의 효율성을 해치지 않는 ‘절차적 통제 장치’를 함께 깔아줘야 ‘건전한 항의’가 가능해진다.
12·3 사태가 던진 질문은 “사람이냐, 법치 시스템에의 충성이냐”였다. 복종 의무 폐지는 맹목적 복종으로 인한 국정 농단의 위험을 차단하는 안전장치여야 한다. 동시에, 행정의 마비나 정치적 편향을 막기 위해 독일식 주구권과 같은 정교한 절차적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공직사회가 ‘침묵하는 충성’에서, 헌법과 국민에게 봉사하는 ‘깨어 있는 전문성’으로 진화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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