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세로 미국서 별세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

‘장희빈’ 등 700여 편 출연

‘지미필름’ 설립해 7편 제작

‘영화인장’으로 치러질 예정

지난 2019년 서울 중구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배우 김지미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9년 서울 중구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배우 김지미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한국의 엘리자베스(리즈) 테일러’로 불린 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숨졌다. 85세.

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최근 대상포진으로 고생한 뒤 건강이 악화돼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로 데뷔한 후 7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미국 유학을 계획하다가 김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돼 17세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명자가 아닌 예명인 ‘김지미’로 살아온 그는 1960년대부터 두각을 보였다.

1960년대에는 ‘장희빈’(1961), ‘메밀꽃 필 무렵’(1967), ‘대원군’(1968)에 출연하며 신인 때부터 최은희, 엄앵란, 도금봉 등 선배들과도 어깨를 견줬다. 1970년대에는 ‘토지’(1974), ‘육체의 약속’(1975), ‘을화’(1979) 등에 출연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이 ‘여배우 트로이카’라 불렸지만, 김지미는 ‘논외’로 놓을 만큼 이미 단단한 입지를 다진 후였다.

1950년대 말 김지미의 데뷔 초 모습. 그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대 말 김지미의 데뷔 초 모습. 그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당시 여배우들의 활동 기간이 짧았던 반면, 고인은 장기간 왕좌를 지켰다. 1980년대부터는 임권택 감독과 손잡고 ‘길소뜸’(1985), ‘티켓’(1986) 등에 출연했다. 두 작품은 아직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길소뜸’으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주연작은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다. 아울러 1985년에는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뒤 ‘티켓’을 비롯해 7편을 제작했다.

50대로 접어든 1990년대에는 배우보다는 한국 영화계를 부흥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을 두루 지냈다.

그러다 지난 2002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직을 내려놓은 후에는 두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주한 뒤 양국을 오갔다. 3년 전 미국 LA영화제 때 마지막으로 고인을 만났다는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그때만 해도 건강했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면서 “고인은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였고, 한때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고생도 했다. 그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식이 뜸해졌는데 국내 영화계에 비판적인 시선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김지미의 전성기를 지켜본 배창호 감독은 “몇 해 전 어느 영화제에서 여전히 고왔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영화계의 진정한 디바이신 김지미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추모했다.

서구적 외모와 더불어 4차례에 걸친 결혼·이혼으로 고인에게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홍성기 감독,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 의사 이종구 씨와 4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한편 고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안진용 기자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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