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용 문화부 차장

중국과 일본 사이에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유사시 대만 개입’ 발언 이후 중국 내 일본 문화 콘텐츠의 유통 및 공연 등을 제한하는 ‘한일령(限日令)’이 발동됐다. 지난 2017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이후 한국 콘텐츠의 중국 수출 및 현지 활동이 중단되는 ‘한한령(限韓令)’을 겪은 한국 시장 입장에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수 K-팝 그룹에 일본인 멤버가 포함돼 있어 K-콘텐츠에도 애먼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지난달 홍콩 화재 여파 속에서 진행된 ‘2025 마마 어워즈’(MAMA AWARDS)가 대형 참사를 위로하며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하는 기회로 삼았듯, 한일령으로 인한 중국 시장 내 일본 콘텐츠 공백을 K-콘텐츠로 메울 기회라는 분석도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한일령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일본 가수 오쓰키 마키가 공연을 펼치던 도중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음악이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공연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마이크를 뺏긴 오쓰키는 당황하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일본 가수 유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의 중국 공연은 취소됐고, 일본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 개봉도 연기됐다.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 전시회가 연기됐다.

하지만 누군가의 위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기회다. 적절한 대처는 비 온 뒤 더 단단해지는 땅을 만든다. ‘2025 마마 어워즈’의 경우, 대형 화재로 홍콩 당국이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하며 행사 취소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중국 내 반대 여론도 적잖았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주최사인 CJ그룹을 비롯해 참여한 K-팝 그룹과 소속사는 ‘연대’와 ‘공감’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CJ그룹은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설립한 웡푹 코트 원조 기금에 2000만 홍콩달러(약 37억8100만 원)를 기부했고, 하이브·SM·JYP·YG·웨이크원 등도 100만∼266만 홍콩달러를 전달했다. 지드래곤과 스트레이키즈 등도 각각 100만 홍콩달러를 보탰다.

이 직후 “공연 취소를 검토하라”던 중국 네티즌의 여론이 크게 달라졌다. 레드카펫 행사를 취소한 주최 측을 비롯해 어두운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추모의 뜻을 밝히고 기부에 동참한 K-팝 스타들에게 “고맙다”는 반응이 줄이었다. ‘2025 마마 어워즈’에서 대상 시상자로 나선 홍콩의 대표 배우 저우룬파(주윤발)가 울먹이며 “홍콩 화재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모두 일어나 묵념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하는 장면은, 문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리적 국경만으로 국가 간 장벽을 쌓을 수 없는 시대다. 문화를 통한 교류와 연대의 가치는 정치·외교적 셈법으로 잴 수 없다. 그래서 K-콘텐츠의 힘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적 문화 외교로 한국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는 기회다. APEC 정상회의 이후 한중 관계도 화해 무드다. 한일령 발동이 한한령 해제로 귀결될 수 있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안진용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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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용 기자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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