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융합연구원장
기존 동맹 전략 폐기한 트럼프
이중성 혼란 심각한 對中 전략
‘끼인 국가’ 한국에 더 큰 도전
선택지 확장할 전략이 급선무
대북 ‘인식 결손’ 우려할 지경
동맹·다자·대북정책 재설계해야
한 시대가 끝났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내놓은 국가안보전략(NSS)은 정부 공식문서라기보다 전략적 불안과 조급함이 묻어난 요구서에 가깝다. 동맹·시장·파트너에 대한 분담 압박을 노골화하며, 미국의 경쟁력 약화와 지정학적 압박감을 드러낸다. 이는 미국 우선주의 제국 전략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며, 한국이 더는 근거 빈약한 전략적 낙관에 기대어 외교안보를 운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NSS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지만, 이는 고립주의가 아니라 군사력 기반의 비용 부과 전략과 동맹의 구조적 동원을 결합한 ‘헤게모니 고수’ 전략이다. 보고서는 한국을 일본과 함께 중국 해군의 서태평양 진출을 차단하는 제1도련선 전진 방위선이자, 중국 공급망 지배 대응의 전략적 첨병으로 명시한다. 이는 지난달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을 러시아 북방 위협 대응과 한·중 해역 전진 기동을 위한 지정학적 비용 부과 플랫폼으로 언급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트럼프 2기의 대중정책은 혼란과 이중성이 교차한다. 1기와 달리 중국을 전략적 적국으로 규정하면서도 경제 영역에서 협력의 여지를 남기고, 디커플링을 외치면서도 중국이 장악한 희토류·배터리·중간재 등 공급망 상류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가 시진핑과의 협상을 강조하며 결정을 미루는 모습은 충돌은 피하고 비용은 동맹이 부담하는 비대칭 구조를 더욱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
이런 제국주의 지정학에서 가장 먼저 압착되는 국가는 세력권 사이에 끼인 국가(stuck state)다. 한국은 미국의 전략 변동성과 중국의 구조적 부상이 교차하는 압력의 정중앙에 있다. 해법은 동맹을 유지하되 종속을 피하는 전략적 공간 확보다.
그 핵심이 다자 안보 협력의 전략적 활용이다. 나토·EU·쿼드 플러스·유엔 등 다자 플랫폼은 미국의 대체재가 아니라, 동맹 의존 리스크를 분산하고 선택지를 넓히는 전략적 보험 장치다. 이를 통해 △대중 견제 부담 분산 △위기 시 외교 백업라인 확보 △국제 의제 설정 능력 강화라는 실질적 국익을 확보해야 한다. 끼인 국가의 생존 방식은 줄타기가 아니라 선택지를 확장하는 전략의 다층화(multilayering)다.
한편, NSS에서 한국이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다. 1기에서 17회 등장하던 북한이 사라진 것은 북핵의 우선순위 이탈을 넘어, 내년 트럼프의 중국 방문과 연계된 ‘사실상 핵보유국 인정-제재 완화’ 빅딜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북·미 결정→한국 사후 통보’라는 한국 패스(Passing Korea) 위험이 구조적으로 커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호혜적 교류·지원을 전제로 해 현실과 괴리가 크다. 북한은 외부 정보를 체제 위협으로 규정해 통제를 극단화하고,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등에 따라 K-콘텐츠 시청만으로도 구금·사형·공개처형 사례가 보고된다. 북한에 개성공단·금강산·민간교류는 기회가 아니라 체제 위험 요인이다. 생존 기반 역시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합법적 범위를 훨씬 넘어선 중·러 불법 네트워크에 있다. 포탄 300만 발 거래에서 정유·식량·정보기술(IT)·사이버 해킹·가상자산 탈취에 이르는 협력 구조 속에서 2025년 상반기 북한의 불법자금만 12억 달러(유엔 추정)에 이른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은 북한에 ‘돈도 안 되고, 위험만 큰 상대’일 뿐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의 “납북자 문제 처음 듣는다”는 발언은 외교안보의 정책 인식 결손을 드러낸다. 지난 정부 시기 납북·억류자 송환 캠페인, ‘물망초’ 배지, 송환비 건립 등이 국내외 언론에 반복적으로 보도됐었다.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집요하게 국제화해 외교 지렛대로 활용해온 것과 달리, 한국은 정권 교체 때마다 국정 원칙을 뒤집어 국제사회 신뢰를 스스로 소진했다.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표방하면서도 실용성과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제국주의 지정학의 압력이 최고조인 지금, 한국의 생존과 번영은 감정적 결기가 아니라 전략적 다층화, 위험 관리 역량, 제도적 일관성에 달렸다. 이것이 한국이 선택해야 할 현실적 외교안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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