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풍수의 명당자리를 골라 무덤을 만드는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시작됐다. 하지만 그것이 과열 양상을 보여 개인 또는 가문 사이에 격렬한 싸움을 벌인 시기는 훨씬 늦은 조선 후기다. 무덤의 명당자리를 놓고 다투며 지방관에게 최종 판결을 요청하는 송사(訟事)가 비일비재했고, ‘산소 자리(山)를 놓고 벌이는 송사(訟)’라는 의미로 산송(山訟)이라고 불렀다. 산송이 너무 많아 지방관의 업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산송의 격화는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의 기운이 서로 응한다는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의 강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지형에서 완벽한 명당 형국은 많지 않았다. 이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개발했다. 현실에선 완벽하지 않아도 마음의 눈으로 완벽한 명당을 재구성해 그린 ‘산소(山)의 풍수 명당도(圖)’라는 의미의 산도(山圖)가 유행했다. 채색의 왕실 산도와 달리 민간에서는 산과 산줄기를 검은 먹선의 흐름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흑백의 산도를 그렸다. 19세기 이후 편찬된 다수의 족보에는 목판에 새겨 인쇄한 시조나 중시조의 산도가 앞쪽에 수록돼 있다.
산도의 산과 산줄기 표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흑백 두 가지 색의 대조만으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그려낸 지도가 있었으니, 바로 김정호의 목판본 ‘대동여지도’(1861)다. 전국을 가로 20㎝·세로 30㎝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총 22첩의 병풍식 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두 연결하면 남북 6.6m·동서 4m의 초대형 우리나라 전도가 된다.
대동여지도를 앞에서 직접 보면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과 산줄기가 검은 먹선의 흐름을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연결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느 문명권,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표현 방식으로,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나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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