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수능 난이도 논쟁에 본질 실종
‘사탐런’ 부추기는 점수 게임化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은 퇴행
기초과학 중요성 갈수록 증대
무엇을 측정할지 재설계할 때
결단 없으면 10년 뒤 국가 재앙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불수능’ 논란 속에 평가원장이 사퇴했다. 그러나 난이도 논쟁은 본질을 가린다. 심각한 문제는 기초과학교육의 붕괴다. 이는 입시 구조, 교육과정, 대학 선발 방식이 얽힌 결과이며, 그 파장은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연계 학생들이 과학탐구 대신 사회탐구를 선택하는 ‘사탐런’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과학탐구 응시자는 전년 대비 최대 47% 감소했고, 물리학Ⅱ와 화학Ⅱ 응시자도 각각 20%, 30% 이상 줄었다. 이는 학생들의 과학 기피가 아니라, 수능과 대학 선발 구조가 기초과학 선택을 불리하게 만든 결과다. 서울대를 제외한 대다수 대학이 이공계열에서 과학탐구 필수를 폐지하면서, 물리·화학이 필수인 이공계에서도 과학탐구가 손해가 되는 역설이 나타났다. 학생 입장에서는 합리적 선택이지만, 수능은 학문적 적합성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점수 전략의 게임으로 전락했다.
문제는 중등교육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신입생 간 기초학력 격차가 벌어진다. 미적분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공대 신입생과 화학 기초가 부족한 화공과 학생이 늘고 있다. 교수들은 고등학교 내용을 대학에서 다시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다. 지역 대학의 기초과학 학과 상황은 더 심각하다. 수학과·물리학과·화학과가 통폐합되거나 모집난으로 존립이 위태롭다. 일부 대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과학기술 인재 양성 체계의 토대가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교육정책 전망(Education Policy Outlook)’은 디지털 전환 시대의 핵심 역량으로 학습자 주도성, 기초역량, 학습 기회 접근성을 제시한다. 수학·과학 같은 기초역량이 청소년기의 자기 주도 학습과 평생학습의 핵심 기반임을 지적한다. 보고서는 한국의 높은 학업성취도 이면에 구조적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25∼34세 청년의 31%가 과잉 자격 상태로 OECD 평균 23%를 웃돈다. 명문대 중심의 경쟁 구조는 학생의 적성을 왜곡하고, 인재와 일자리 간 불일치를 심화시킨다. 그 근저에 기초역량 약화가 있고, 그것이 구조적으로 방치되고 있다.
기초과학은 ‘기초’에 머무는 학문이 아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기후·에너지 등 모든 첨단 분야는 수학과 과학이라는 언어 위에서 발전한다. 양자컴퓨팅은 선형대수와 양자역학 없이는 이해할 수 없고, 신약 개발도 유기화학과 분자생물학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기초가 무너지면 응용과 혁신은 지속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정책적 결단이다. 2028 수능 개편은 과목 조정이나 난이도 논쟁을 넘어, 기초과학 학습이 불리하지 않도록 평가 구조를 재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무엇보다 이공계 진학자에게 과학탐구를 필수화하고, 수학은 미적분·기하 등 기초역량을 회피할 수 없도록 반영 방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학은 선발기준에서 학문 적합성을 명확히 제시해야 하며, 이공계 모집 단위에서 과학탐구를 선택하면 불리해지는 현재의 구조는 ‘사탐런’을 부추기는 만큼 조정이 필요하다. 대학의 기초과학 교육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지역 대학 기초과학 학과 유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안정적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제안한 2040년 수능 폐지 로드맵도 같은 관점에서 검토돼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 속에서 전국 단일 경쟁시험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수능 폐지가 곧 기초학력 회복을 뜻하진 않는다. 내신 중심 전형으로의 전환은 학교·지역 간 평가 신뢰도 격차를 키울 위험이 있다. 핵심은 시험 존폐가 아니라,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이다. 기초 수학·과학 역량을 국가가 책임지고 검증할 최소한의 공적 평가 장치는 필요하며, 학교 교육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기초과학 교육은 성과가 늦게 나타나지만 붕괴는 빠르다. 지금의 방치는 10년 후 산업 현장의 인재 부족으로, 20년 후 국가 경쟁력 약화로 돌아온다. 교육정책에서 가장 큰 비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다. 기초과학 교육 재건은 특정 집단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미래 산업과 사회를 지탱할 국가의 책임이다. 지금의 정책 선택이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다음 세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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