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인공지능(AI)이 대량으로 만든 저품질 콘텐츠를 가리키는 슬롭(slop)이 최근 이코노미스트와 메리엄 웹스터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됐다. AI와 슬롭을 합해 ‘AI 슬롭’이라고도 한다. 이는 원래 ‘질척한 진흙’ ‘찌꺼기’ ‘오물’이라는 뜻인데 우리 시대를 비추는 자조적 신조어가 됐다. 메리엄 웹스터는 슬롭의 사례로 황당한 영상, 기괴한 이미지, 가짜뉴스를 들면서 ‘사람들은 짜증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소비했다’고 전했다. 조잡한지 알면서도 끝없이 클릭했다는 뜻이다. 슬롭은 올 한 해 정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드러내 유튜브·동영상·가짜뉴스가 중심이 된 선동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슬롭 정치’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한국이 이 쓰레기 콘텐츠의 선두에 있다. 최근 AI 영상 편집 플랫폼 카프윙이 국가별 유튜브 채널 상위 100개를 분석한 결과, 한국이 슬롭 영상 소비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슬롭을 가장 많이 보고, 만들고, 퍼뜨리는 나라’였다. 한국발 AI 슬롭 채널 조회 수는 약 84억5000만 회로 2위 파키스탄(약 53억 회), 3위 미국(약 34억 회)을 크게 앞섰다. 한국인의 유튜브 이용 시간이 월 40시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인데 상당 부분이 슬롭 위주로 흘렀다는 것이다.

슬롭과 쌍을 이루는 단어로는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지난해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브레인롯(brain rot)’이 있다. 슬롯 같은 저품질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해 뇌가 썩어 멍해진 상태를 뜻한다. 디지털 과잉과 그로 인한 문명의 쇠락은 몇 년째 전 세계 공통의 화두가 되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 시민들이 쾌락과 오락, 그리고 ‘소마’라는 약에 취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미래 사회를 그렸다. 과도한 쾌락적 자극과 오락이 비판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과잉의 디스토피아’로, 슬롭은 이 디스토피아의 디지털 버전처럼 보인다. ‘슬롭과 뇌썩음’ 시대, ‘멋진 신세계’의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인 “나는 불행할 권리를 원한다(I claim the right to be unhappy)”를 이렇게 바꿔 본다. “나는 슬롭에서 벗어날 권리를 원한다.” 사실 이 권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쓰느냐, 포기하느냐 선택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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