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대한민국은 지금 2개의 거대한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안으로는 ‘지방 소멸’이라는 인구 위기와의 전쟁, 밖으로는 국가의 명운을 건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 중이다. 최근 정치권 일각의 “반도체 클러스터의 호남 이전” 또는 “지방 분산 배치” 요구는 전자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고육책일 것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타파하고 국토를 고루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대의명분에 반대할 국민은 없다. 지방균형발전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긴 호흡으로 풀어내야 할 국가적 숙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위’가 ‘현실’을 덮을 수는 없다. 특히 1분 1초가 급박한 초격차 기술 전쟁터인 반도체 산업에서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논리에 의한 기계적인 ‘분산’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적 집중’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수도권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반도체는 공장이라는 하드웨어가 짓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반도체 업계에는 ‘취업 남방한계선’이란 말이 공공연히 떠돈다. 판교, 기껏해야 동탄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겠다는 게 최상위 공학 인재들의 확고한 인식이다. 이는 단순히 기업이 연봉을 더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정주 여건, 자녀 교육, 문화적 인프라, 그리고 동종 업계 인재들과의 교류 가능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해외 경쟁국들의 사례를 뼈아프게 직시해야 한다. 대만은 우리보다 국토가 좁은데도 ‘신주(新竹) 과학단지’에 연구소와 공장, 대학을 밀집시키는 ‘초집적 전략’으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설계부터 생산, 후공정까지 차로 1시간 이내에 해결되는 이 효율성이 깨지는 순간 경쟁력은 추락한다.
반면, 미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섬뜩한 경고이다. 미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보조금을 받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건설 중인 TSMC 공장은 심각한 가동 지연을 겪고 있다. 전기가 없고 땅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곳에서 일할 ‘숙련된 엔지니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인재들은 사막기후인 애리조나행을 거부했고, 결국 대만 본사에서 기술자 수백 명을 급파해야만 했다.
미국조차 겪고 있는 이 ‘인재 쇼크’가 한국이라고 예외일까? 인위적인 지역 안배를 위해 인프라(전기, 용수)만 믿고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옮기는 순간, 우리는 제2의 애리조나 사태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기업들이 전력난과 수도권 규제라는 이중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용인을 고집하는 이유는 ‘서울공화국’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인재가 없는 곳에서는 기업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처절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인재가 없는 반도체 공장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호남에 재생에너지가 아무리 풍부해도, 그곳에서 일할 ‘두뇌’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기술 초격차는 요원해진다. 속도전에서도 치명적이다. 물론 수도권 전력난과 용수 문제, 그리고 지방의 소외감은 뼈아픈 문제다. 하지만 이는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이 무너져 국가 경제가 휘청인다면, 그때는 균형발전을 논할 지방조차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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