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제2대 국제형사재판소 (ICC) 소장

‘국제형사재판소(ICC)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국제형사범죄법)이 2025년 12월 21일로 제정 18주년을 맞았다.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로마규정) 비준에 이어 국내법상 인도에 반한 죄(반인도범죄), 전쟁범죄, 집단살해죄(제노사이드)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한 것은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다. 따라서 국제형사정의 실현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인권·법의 지배 등 보편적 가치의 확산을 위해 ICC와의 협력협정 체결, 침략범죄 등의 로마규정 개정 비준·이행, 유엔 반인도범죄 방지협약 채택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뉘른베르크 및 도쿄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과 일제 전범이 침략전쟁과 잔학행위에 대해 처벌받은 것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는 상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구유고 및 르완다 전범재판을 계기로 논의는 다시 탄력을 받아 1998년 ‘로마규정’ 채택과 2002년 로마규정 발효로 ICC가 출범하게 됐다.

ICC는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각 로마규정 당사국이 자국 법원에서 먼저 관할권을 행사하고, ICC는 해당국이 진정으로 수사·기소를 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경우에만 개입한다. 따라서 ICC 체계는 많은 나라가 로마규정을 비준·가입하고, 각 당사국이 ICC 관할 범죄를 국내 법원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국내법을 정비해야 제대로 운용될 수 있다.

그런데 로마규정의 125개 당사국 중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19개국(15.2%)에 불과하고, 이 중 동아시아는 대한민국·일본·몽골·캄보디아 4개국(3.2%)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 나라 가운데 일본은 이행법이 없고, 몽골과 캄보디아도 이행법이 미흡하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드물게 국제형사정의 증진에 앞장설 수 있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또한, ICC는 개별 국가와 금고형 집행, 증인의 인도와 이주·보호 등에 관한 기술적 절차를 규정한 협력협정을 체결해 왔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만 ICC와 협력협정을 체결한 나라가 없어, 예를 들어 ICC에서 아시아 출신 전범에게 금고형을 선고해도 유럽이나 다른 대륙에서 형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ICC와 형집행협정을 체결한다면 국제형사정의 실현을 위해 힘쓴다는 평가를 받고 역내 다른 국가들에 귀감이 될 것이다.

1998년 처음으로 채택된 로마규정은 수차례 개정됐다. 특히, 2010년 로마규정 당사국들은 뉘른베르크 및 도쿄 전범재판의 ‘평화에 반한 죄’에 해당하는 ‘침략범죄’의 정의를 추가하는 개정안을 채택했고, 현재까지 125개 당사국 중 49개국이 이를 비준·수락했다.

주변국의 침략에 시달려온 우리나라로서 ‘침략범죄’의 정립은 사활적 국익이다. 북한의 군사 도발이 예상되는 경우 자위권 행사의 제약, 주한미군기지를 통한 미국의 군사작전에 대한 법적 책임 발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군사 위협이 상존하고, 나토(NATO) 회원국으로 미군기지가 있는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유사한 우려를 불식시킬 침략범죄 개정안의 채택을 주도하고, 비준·수락했다.

한편, 2024년 12월 유엔총회는 2029년까지 ‘반인도범죄 방지협약’의 최종 채택을 결의했다. 2026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교섭 과정에서는 강제실종 등 반인도범죄 정의의 일부 업데이트뿐만 아니라, 반인도범죄의 방지와 피해자 구제 규정까지 논의될 것이다. 정부는 아시아 각국의 지지를 호소하고 인권단체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다.

세계 인구의 60% 이상이 거주하는 아시아는 유럽·미주·아프리카와 비교해, 당연히 있어야 할 아시아인권재판소 부재에서 보듯이, 지역인권과 사법정의 발전이 더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내외 국제형사정의 실현을 통한 평화와 인권 확립은 지역인권보호 체계의 구축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해외에서 우리 국민과 기업에 안전망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적극적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송상현 제2대 국제형사재판소 (ICC) 소장
송상현 제2대 국제형사재판소 (ICC)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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