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15)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53년간 전통 방식대로 장 담가

콩·천일염 등 토종재료만 고수

 

2024년 씨간장 들고 중남미行

유네스코에 ‘장 문화’ 등재 공신

 

25개국 셰프 40여명 담양 찾아

간장·된장 만든 뒤공수받아 요리

 

전통 장 극심한 쇠퇴 안타까워

장 활용한 요리법 책 내는 게 꿈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이 지난달 24일 1200개의 장 항아리가 줄지어 늘어선 전남 담양 장독대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 장 담그기 문화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기순도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이 지난달 24일 1200개의 장 항아리가 줄지어 늘어선 전남 담양 장독대에서 사라져 가는 우리 장 담그기 문화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담양 = 글·사진 김대우 기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듯한 비좁은 골목길을 굽이 돌아 오르다 보면 항아리 1200개가 줄지어 늘어선 장관이 펼쳐진다. 370년간 대대로 내려온 종가의 방식 그대로 지난 53년간 콩과 물, 소금 그리고 시간으로 묵묵히 장(醬)을 담그며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기순도(76)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35호·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대표)의 장고(醬庫·장독을 보관하는 장소)다. 2024년 12월, 370년 된 종가의 씨간장을 비행기에 싣고 파라과이로 날아가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일등공신, 기순도 명인을 지난달 24일 ‘장꽃이 피는 마당’ 담양 장고에서 만났다. 유네스코 등재 이후 한국의 전통 장을 인류가 지켜야 할 유산이자 지역을 살리는 미래 성장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해외출장을 다니며 우리 장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기 명인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간 계승 발전시켜온 장 문화를 후손들에게 잘 물려줘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의무이자 책무”라고 말했다.

◇콩·물·소금, 시간으로 빚어내는 명인의 장= 기 명인은 1972년 장흥 고씨 종가(양진재 문중 10대 종부)로 시집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은 옛날 방식 그대로 장을 담그고 있다.

국산 콩으로 동짓달 말날(午日)에 메주를 쑤고, 한옥 황토방에서 메주에 발효균을 피워 소금물로 간을 한다. 소금은 죽염을 쓴다. 3년 이상 된 담양 대나무에 신안 천일염을 다져 넣어 700도 황토 가마에서 3박 4일간 9번을 구워낸다. 메주를 쑤는 데 사용하는 국산콩 2000가마(연간)는 모두 지역농산물이다. 죽염을 만드는 데 쓰는 대나무는 담양, 천일염은 신안에서 구매해 쓴다.

청정 160m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물에, 맑은 공기로 호흡하는 옹기 항아리에서 지난한 발효 과정(청장 1∼2년·중간장 3∼4년·진장 5년 이상)을 거쳐야 비로소 장이 된다. 메주가 죽염수를 만나 우려낸 것이 간장, 항아리에서 건져낸 메주는 된장, 메줏가루에 고춧가루와 찹쌀을 섞으면 고추장이다.

전통 장 담그기는 고된 과정의 연속이지만 기 명인은 ‘장 담그기가 사라지면 전통의 맛도 사라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종가의 방식 그대로, 장을 담근다. 다른 첨가물 없이 오직 콩과 물, 소금으로만 자연 발효하기 때문에 복합적인 맛이 난다. 기 명인은 종갓집 씨간장에 새로운 장을 더하는 ‘덧장’ 문화도 이어오고 있다. 씨간장의 맥을 잇고 전통 제조법을 계승해 온 점을 인정받아 2008년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진장)으로 지정됐다.

기 명인은 “우리 장은 수천 년간 식탁을 지탱해온 민족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며 “자연과 사람,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빚어낸 발효의 미학으로,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한국인의 철학이 깃든 유산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 한국의 장 알린 전도사= 국내에서는 비상계엄 선포로 긴장과 불안이 극에 달했던 2024년 12월 3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가 인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를 인정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등재 당시 기 명인의 양손엔 가문 대대로 내려온 370년 된 씨간장 단지가 들려 있었다. 기 명인은 장 담그기 전통의 산증인으로, 그가 대를 이어온 씨간장은 한국의 장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 명인은 “유네스코 등재로 우리 장 담그기 문화가 이제 세계인이 함께 지켜야 할 유산이 됐다”며 “2016년부터 시작된 지난 8년의 여정이 쉽지 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인의 삶과 철학이 응축된 우리 장 문화가 인류무형유산이 된 쾌거였는데도 어수선한 시국으로 국민에게 충분히 알리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며 “유네스코 등재는 한국 발효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우리 장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네스코 등재 1주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와 영국 브리스틀까지 직접 날아가 현지 유명 셰프들과 미식가들에게 ‘담양장맛’을 알렸다.

기순도 명인에게 우리 전통 장 담그기를 배우고 있는 해외 유명 셰프들.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제공
기순도 명인에게 우리 전통 장 담그기를 배우고 있는 해외 유명 셰프들.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제공

◇세계 미식 거장들의 ‘순례지’ 담양 장독대= 기 명인은 세계 셰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 인사다. 뉴욕의 미슐랭 3스타,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분자요리 선구자 등 세계 미식계를 이끄는 톱 클래스 셰프들이 명인의 장맛을 배우겠다며 ‘담양 장독대’를 찾고 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가 선보인 한우갈비에 기 명인의 370년 된 씨간장이 사용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특별한 간장을 썼다는 내용이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가장 최근 담양 장독대를 다녀간 파리 미슐랭 3스타 ‘르 프레 카틀랑(Le Pre Catelan)’의 오너 셰프 프레데릭 안톤은 “한국의 전통 장은 내 요리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열쇠”라고 극찬했다.

셰프들은 기 명인에게 배운 방식으로 직접 간장과 된장을 담가 담양 장고에 보관 중이다. 25개국, 셰프 40여 명의 이름표를 단 항아리들이 현재 익어가는 중이다. 셰프들은 장이 숙성되면 필요할 때마다 공수받아 요리에 활용한다고 한다. 명인의 장은 2019년 세계 식품동향을 이끄는 프랑스 파리 르봉 마르셰 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한 후 미국 아마존과 일본 큐텐재팬 등 해외 유수 온·오프라인 매장까지 수출을 확대하며 우리 전통 장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설자리 잃어가는 전통장 위기= 기 명인은 “세계 각국에서는 한국 전통 장을 배우겠다며 담양 장고를 문턱 닳도록 드나드는데 정작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며 “발효 없이 며칠 만에 첨가물로 맛을 낸 혼합간장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네스코 등재와 세계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통 장은 극심한 쇠퇴기를 겪고 있다. 대량 생산된 일본식 양조간장의 유입, 아파트 주거문화, 서구화된 식습관 등이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과거 집집마다 장독대가 있어 간장, 된장 등을 직접 담가 먹었으나 지금은 장독대 있는 집을 찾기 힘들다. 우리 장 담그는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기 명인은 “한국에서 외면하는 우리 장 문화를 해외에서 오히려 극찬하고 대접한다”며 “장 담그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문 요리사들마저 양조간장이나 일본간장을 쓰는 현실이다 보니 우리 장맛까지 잃어버려 이를 지키고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급격한 기후변화마저 전통 장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이 길어지면서 메주에 피어나는 균의 종류가 달라졌고, 장독 안 숙성 과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 중심의 법규제와 제도도 장 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우리 장은 오래 숙성할수록 깊은 맛이 나는데, 소비기한을 표기토록 하는 현행 식품법은 큰 걸림돌이다. 기 명인은 “정작 우리 고유 장에는 ‘한식간장’이나 ‘재래간장’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심지어 된장 명칭은 일본 ‘유래 장’에 내줘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며 “우리 고유의 명칭인 간장과 된장, 메주 이름을 되찾아 식문화의 자존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음식문화, 세계로 확장= 반백 년 이상을 우리 장과 함께해온 명인은 장독대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음력 정월 말날 시민을 초청해 장을 담그고, 비건 발효밥상을 나누며 사라져 가는 우리 장 담그기 공동체 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셰프들이 자신만의 장을 담가 요리에 활용할 수 있는 ‘셰프 시그니처 장 프로젝트’를 통해 책 출간을 추진 중이다.

기 명인은 “한국 전통 장을 요리에 활용한 셰프들의 레시피를 받아 책을 내는 게 꿈이다. 우리 장을,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라며 “나는 한식의 뿌리인 장을 만들지만, 셰프들은 그 장으로 한식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기 명인은 사단법인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를 설립해 장을 지키고 장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보존에도 힘쓰고 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씨간장은 며느리가, 전통장은 딸이 전수자로 등록해 계승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숙명을 이어갈 것”이라는 그는 “후대가 우리 장을 지키고 이어갈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함께 제도적 기반 마련,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순도 발효학교 1기 수료식.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제공
기순도 발효학교 1기 수료식.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제공

미슐랭 셰프·흑백요리사도 ‘기순도 발효학교’ 졸업생

 

입소 경쟁 치열… 3기까지 32명

美 수강생 석 달 머물며 장 배워

“‘기순도 발효학교’는 단순한 음식 체험장이 아닙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요리학교에 전 세계인이 모이듯, 한국의 발효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명문 교육기관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기순도 명인은 한국 음식의 근본이자 문화유산인 전통 장 제조법을 지키기 위해 지난 2023년 10월 기순도 발효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에서는 된장과 간장에 대한 이론 교육뿐 아니라, 직접 메주를 쑤고 장독대에 장을 담그는 체험을 한다.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인의 식생활에 맞춘 다양한 활용법을 함께 소개하며,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기순도 발효학교는 1년에 2차례 각 8주 과정으로 운영된다. 대기업 발효담당자, 고급 호텔 요리사 등이 명인에게 전통 장을 배우고 전통 발효 밥상을 체험했다. 지금까지 발효학교를 거쳐 간 1∼3기 졸업생만 32명이다. 졸업생 중에는 일본 간장 연구자와 대기업 한식연구소 관계자를 비롯해 유명 특급호텔 셰프, 세계적인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 등 식품업계 전문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발효학교에 입소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많은데 수강생이 10명 내외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온 한 수강생은 담양에 석 달간 머물며 한국 전통 장을 배웠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에 출연한 김희은 셰프와 최근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제99호)으로 지정된 육경희 순대실록 대표도 기순도 발효학교 1기 수강생이다.

기순도 발효학교는 지역사회와도 긴밀히 협력하며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담양군과의 협력사업으로 지역 외식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장 담그기 교육을 진행 중이다. 지역 식당들이 직접 담근 우리 전통 장을 쓰도록 해 담양 음식의 품격을 높이고 진정한 ‘미식도시’로 거듭나도록 돕기 위해서다. 기 명인은 발효학교를 열기 전 2015년부터는 이화여대에서 전통 장 담그기 강의를 진행해왔다. 기 명인은 “우리 음식을 만든다는 사람들이 우리 간장이 아니라 양조간장과 소금으로 실습을 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웠다”며 “교육을 통해 우리 전통 장이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먹거리이자 지역을 살리는 훌륭한 자원임을 증명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대우 기자
김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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