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 논설위원

국빈 방중한 이재명 대통령이 6일 상하이를 방문했다. 올해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건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기 위한 차원이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최근 ‘김구는 한국의 상징적인 독립 지도자이자 일본 식민 지배에 맞선 투쟁의 중심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이 대통령) 기념 활동은 중한 양국이 공유하는 반파시즘 유산을 부각한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명확한 신호를 보냈 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김구는 중국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장제스를 만난 김구는 중국 지원 아래 일본·조선·만주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대신 한인 군관 양성을 제안했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했다. 이는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에서 양성된 한인 군관들과 함께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된다. 장제스의 이런 지원에는 이들을 만주 지역의 항일의용대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곳곳을 전전하던 김구의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으로 옮겨 그해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941년 12월엔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종전 후 한국의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올바른 정세 판단이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국가 원수 명의로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서한도 발송했다. 일본 패전 후 장제스는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을 지원하는 한편 1억 위안과 20만 달러라는 거액의 특별지원금을 건넸다. 임시정부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친중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한반도 분단과 국공 내전으로 장제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임시정부와 무관한 중국 공산당이 이제 와 김구 선생을 고리로 일본에 맞선 반파시즘 공유 운운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군사 개입’ 발언으로 중일 갈등이 고조되자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으로 봐야 한다. 중국의 말과 행동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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