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성기 형의 얼굴에서 나이 듦의 아름다움,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 23년 전, 사진작가 박상훈 씨가 안성기 배우를 촬영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카메라 너머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찾아낸 포인트가 눈가에 깊게 팬 주름이었다. 그때는 51세 중년. 세월의 흔적보다 식지 않은 열정이 더 나아 보였는데 작가는 굳이 주름을 고집했다. 새 신문 창간에 맞춰 ‘스타 갤러리’라는 타이틀로 첫선을 보일 화보 작업이었다. 대작 ‘실미도’의 개봉도 앞둔 시점. 아무래도 당사자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주름이라는데…” 하고는 눈치를 봤다.
“아, 좋아요. 하하.” 의외의 반응에 주변이 놀랐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에게 변함없는 얼굴을 보이고 싶은 게 배우들의 마음일 것이다. 더구나 배우로서 최정상일 때가 아닌가. 그는 달랐다. 이후 언론과 인터뷰 때마다 그 주름이 화제가 됐다.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연기론도 거기와 맞닿았다. “많은 분이 주름을 없앤다. 하지만 특히 배우는 주름을 없애면 안 된다. 주름에서 깊이가 나온다. 감정이 많이 묻어 있다. 배우에게 주름은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고칠 의향이 없느냐”고 짓궂게 물어도 “안 된다”고 웃어넘겼다. “배우에게는 조그만 주름, 근육의 움직임도 연기다. 예쁜 것만 아름다운 건 아니잖느냐.”
박 작가는 후일 “카메라로 그를 보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주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당시 주름이 강조된 그의 사진 옆에 이런 글을 달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그리 서글프지도 추한 일도 아니다. 지혜로운 연륜이 쌓인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는가. 열정으로 일궈낸 세월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자기 성찰 속에서 드러난 평화로운 삶의 징표, 이것이 바로 주름이다. 그것으로 우리를 위로할 웃음을 짓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를 만들어낸다.’ 그 지면의 제목이 ‘주름이 만든 카리스마’였다.
“아시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얼굴”(중국 감독 자장커)에 온화, 겸손, 진솔이 배어 있던 고인. 천의 얼굴로 스크린을 장식하며 ‘국민배우’로 불렸던 비결이 ‘주름론’에 있지는 않았을까. 그의 커다란 유산을 평가하는 얘기가 쏟아지는데, 고인을 기리는 마음에 어쭙잖은 에피소드를 하나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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