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1926년 초 동아일보에 ‘10년을 하루같이’라는 제목으로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을 한결같은 길을 가는 이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1월 15일에는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 된 산파(産婆)로 13년을 살아오며 800여 명의 아이를 받아낸 최애도 씨의 이야기가 담겼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기를 ‘할머니’라고 하는 직업 부인이 있으니, 경성 관훈동 66번지 최애도라는 분은 금년 33세인데 조선 산파계의 시조(始祖)로 13년 동안을 한결같이 우리 조선의 제2 국민이 될 옥동(玉童) 옥녀(玉女)의 해산관(解産官) 노릇을 한 분이랍니다. 그는 1912년에 총독부 의원 안에 간호부와 산파 양성소가 처음 설립될 때 그곳에 입학해, 1914년에 제1회로 그의 아우 되는 최효신 여사 등 세 분이 졸업하니 이때 나이는 19살이었다고 합니다. 졸업을 하였으니 즉시 개업을 할 것이었으나 성년이 못 되어 산파 면허를 얻지 못하던 중 태화여학교에 교원으로 계신 그의 형님 최은경 여사의 남편 이창우 씨가 총독부 의학교를 마치고 개성에 가서 개업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를 따라 개성에 가서 간호원으로 1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러다 1915년 가을에야 비로소 면허를 얻어가지고 그곳에서 처음 개업을 한 후 3년 동안으로 산파 노릇을 하다가 1917년 가을에 경성에 올라와서 와룡동에다가 처음 간판을 내붙였었다고 합니다.”

기사는 산파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최 씨의 회고로 이어진다. “내가 졸업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생각을 하니 새삼스럽게 놀랍습니다. 벌써 13년이 지났고, 그동안 내 손으로 받은 아이가 800여 명이나 됩니다. 내가 견습으로 받은 아이 중 숭이동 오상현 씨의 셋째 아들 학수는 벌써 14살이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산파로서의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조선의 산파는 참 고통입니다. 지금도 경성 시내는 그다지 심하지 않습니다마는 시외(市外)만 가더라도 산파라면 산모나 어린애를 잡는 귀신같이 여기는 가정이 있답니다. 내가 처음 개업할 때에는 산파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분도 많았었지요. 개성에서 개업을 하고 첫 개시로 이규팔이란 분의 초빙을 받아 그의 손자를 받으러 갔었을 때에는 참말이지 기가 막혔습니다. 그 집에 떡 들어서니까 산모가 있는 방을 부인들이 가로막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며 그저 몰아내 쫓으려고만 하였답니다. 그러나 산모의 나이는 18살인데 첫 해산이라 매우 급한 모양이며 위험한 지경이었는 고로, 오히려 산모를 구하자고 빌다시피 했습니다마는 들어주어야지요. 게다가 아이 아버지는 17살로 보통학교 생도이니 그 사람인들 산파라는 것을 알아주겠습니까. 참말 위기일발(危機一髮) 중에 있는데 나를 불러간 아이 할아버지께서 ‘위험하니 어서 보이라’고 해서 급한 것을 구원한 일까지 있었답니다. 13년 동안에 쌍둥이도 너덧 번 받아보았지요. 그런데 쌍둥이들은 대개 잘 자라기가 어려운 모양이에요. 우선 청석골 해동은행 영업과장 조남준 씨도 연전(年前)에 쌍녀(雙女)를 낳았는데 겨울 돌이 지나서 홍역으로 둘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산파란 필요하지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산파들을 잘 불러 쓰지 아니하는 모양이에요. 산파로는 나도 상당히 버는 터이지마는 작년의 총수입이 400원가량밖에 못 되었으니까요. 많지 않은 산파의 수입이 이렇게 적은 것을 보면 아직도 조선 사람은 산파를 모른다는 것이 증명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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