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준의 Deep Read - 李 방중이 남긴 것
정상회담에 공동선언·발표도 ‘북 비핵화’ 표현도 없어… 북핵, 양국 핵심 이슈에서 멀어져
한중관계, 외교의 호혜적 국면에 이르지 못해… 韓, 강대국 정면충돌 속 명확한 선택해야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중국 방문은 2019년 이래 6년여 만의 한국 대통령 방중이었다. 중국의 사드(THAAD) 제재로 한·중 관계가 구조적 경색 국면에 들어선 뒤, 정상 차원의 공식 방문은 사실상 중단 상태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이번 방중은 그 자체만으로도 외교적 관심을 끌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이 끝난 후 공동성명도 공동발표도 없었다. 중국 측 발표에서는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은 물론 ‘한반도 비핵화’라는 의례적 레토릭조차 쑥 빠져버렸다. 이 대통령의 방중은 신냉전 구도라는 엄중한 국제질서와 한·중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공동성명 없는 정상회담
오랜만의 방중이고 그간 밀린 미결 현안이 산적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정상회담은 공동성명도 공동발표도 없고 별다른 합의사항도 없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과 신냉전 구도가 일상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중국이 공유할 수 있는 외교적 입장을 찾기 쉽지 않은 국제정치적 현실을 여실히 반영한다.
외교무대에서 중요한 회담의 합의사항을 공식 발표하는 건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어떤 형식으로건 합의사항의 대외 발표를 통해 이를 양국 내에서 공식화함으로써 합의를 번복하지 않고 성실한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양국의 합의사항을 제3의 이해당사국들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국 측은 응당 북한 비핵화 문제, 남북관계 문제, 중국의 사드 제재 해제 문제, 서해 인공구조물 문제, 서해 중국 어선 불법조업 문제 등 관심사를 제기했을 것이다. 중국은 핵심 관심사인 대만 유사시 문제, 대중국 공급망 통제 문제, 북한 문제, 주한미군 역할 문제, 한·미 연합훈련 문제 등 현안을 언급하고 협조와 지지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합의사항 발표가 없다는 건, 양측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거나 또는 제3국을 의식해 공개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비핵화 빠진 브리핑
이번 회담 이후 중국 측 발표에서 북한의 비핵화 문제가 완전히 삭제됐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지금까지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 중국은 과거 6자회담에서도 ‘북한의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한 표현을 고집하는 북한의 입장에 동조해 이를 관철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강력한 대북제재를 저지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 측 발표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하고 의례적인 수사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은 과거에도 북한의 추가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 다분히 의례적 차원의 우려를 표했지만, 북한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거나 훼손할 만한 압박에는 일관되게 선을 그어 왔다. 체제 안정과 접경지역의 안전이 최우선인 중국의 전략적 계산 속에서, 북핵은 이미 위협요소라기보다는 국경지대의 안정을 보장하는 긍정적 요소가 됐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그러한 태도는 그간 일관되게 지속돼 온 북한 정권 비호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북한 핵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이 퇴조한 상황에서 그 문제가 한·중 양국 사이의 중요한 현안이 아니라는 중국 정부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한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한 표현조차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북한 핵문제가 양국 간 핵심 이슈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이번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한국에 제기한 요구들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 대통령의 방중 전 중국 측이 ‘4요4답’을 요구했다는 대만 언론 보도에 미뤄볼 때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 인정, 주한미군 개입 등 지역 임무 확대 반대, 반도체와 인공지능 등 전략 산업에서의 협력 등을 요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요구는 과거 사드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입장을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 주석이 이 대통령에게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고 한 것은 ‘공자 말씀(이 대통령 표현)’이 아니라 ‘줄 똑바로 서라’는 압박성 주문이었다. 외교는 본질적으로 상호주의적 거래이지만, 이번 회담에서 중국 측의 상응하는 양보나 호혜적 약속이 있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34년의 수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중 관계가 상호존중적·호혜적 국면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인들은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 불렀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긴밀한 인적·물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양국이 과거사의 굴레에 얽매여 감정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었던 현상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 표현이 이젠 중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용어가 됐다. 과거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60∼70%에 달했던 한국 사회는 사드 제재 이래 중국의 고압적 대국주의 여파로 지금은 비호감도가 70∼80%에 달한다.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한국의 대중국 정책은 ‘안미경중(安美經中)’과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정의되곤 했다. 그것은 미·중 패권 대결이 시작되던 시점에 막대한 대중국 무역흑자를 포기할 수 없고 미국의 안보 지원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한국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외교적 피안(彼岸)’이었다. 물론 그런 이율배반적 외교는 쉽사리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대중국 무역흑자가 2023년부터 적자로 반전되고 철강·전자·화학·조선·가전·자동차·생필품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산 저가 공산품이 국내 제조업 전반을 무서운 속도로 압박해 오는 시점에 안미경중의 논리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신냉전 국제질서가 외교·군사·무역·금융·과학기술·에너지 등 대외관계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하는 현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이 설 땅은 없다.
국제사회의 현실은 한국에 대해 더 정교한 외교전략, 더 명확한 우선순위, 그리고 감정이 아닌 현실에 기초한 외교적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세계는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정면충돌하고 있다. 모든 나라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으며, 선택의 무대는 머지않아 동아시아로 넘어올 수 있다. 한국은 선택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세종연구소 이사장, 전 외교부 북핵대사
■ 용어 설명
‘4요4답’은 중국이 이재명 대통령 방중을 앞두고 한국에 ‘하나의 중국’ 재확인 등 네 가지 요구를 했고, 반대급부로 ‘한한령 해제’ 등 네 가지 약속을 했다는 것. 대만 언론이 보도했지만 정부는 부인.
‘한반도 비핵화’란 북한 비핵화는 물론, 한국의 핵우산과 미국 핵위협 제거,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포괄하는 개념. 북한의 핵무기·프로그램의 완전한 폐기만 뜻하는 ‘북한 비핵화’와는 맥락상 차이가 큼.
■ 세줄 요약
공동성명 없는 정상회담: 최근 이재명의 방중은 6년 만의 한국 대통령 방중이었지만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이나 발표도 없었고, 중국 발표에서 ‘북한 비핵화’ 표현도 없었음. 북핵이 양국 핵심 이슈에서 멀어져 가는 상황.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이 대통령에게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고 한 것은 ‘공자 말씀’이 아닌, ‘줄 똑바로 서라’는 압박성 주문. 한·중 관계는 여전히 상호존중적·호혜적 국면에 이르지 못하고 있어.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 ‘전략적 모호성’이란 과거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외교적 피안’. 그러나 신냉전 국제질서에서 전략적 모호성이 설 땅은 없어. 강대국의 정면충돌 속 한국은 외교적으로 명확한 선택을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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