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경 산업부 차장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복판에는 10년 넘게 폐교설에 시달리는 학교가 있다. ‘천당 아래 분당’에서도 부촌인 정자동에 있는 백현초다. 매년 10명 남짓한 학생만 들어올 정도로 신입생 유입은 적다. 반면, 인근 다른 학교는 과밀 상태다. 백현초는 속칭 ‘임대촌’에 있다. 임대주택 이미지가 덧씌워질까 봐 학부모들은 이사를 가거나 주소를 옮겼다. 폐교 위기 이유는 다름 아닌 배정 기피다.

서울에선 ‘한강뷰 갈등’이 커지고 있다. 용산, 잠실, 여의도 일대 재건축단지에 서울시가 ‘한강뷰’ 임대아파트를 배치하라고 요구하면서다. 임대주택과 일반분양을 분리 배치한 강남구 대치동 ‘디에이치 에델루이’는 벌금 20억 원을 냈다. 집값을 고려하면 임대주택과 섞이느니 차라리 벌금을 내고 말겠다는 것이다. 임대세대를 소음이 심한 도로변에 짓거나 외벽 페인트를 다르게 칠하는 곳도 많다. 서울 마포구 주상복합아파트 메세나폴리스에서 임대주민들은 불이 나도 옥상으로 대피할 수 없다. 임대세대를 저층에 몰아넣은 후 비상계단을 막아 분리한 탓이다. 이곳은 ‘소셜믹스(분양·임대 혼합 배치)’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힌다.

소셜믹스는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정책이다. 이는 1980년대 홍콩, 싱가포르에서 시작돼 유럽으로 확산했다. 부자와 빈자가 같은 공간에 살면서 사회적 격차를 줄이자는 취지다. 이재명 정부 기조도 소셜믹스 확대다. 이미 이 대통령은 지난달 국토교통부 업무보고에서 역세권에 넓은 임대주택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소셜믹스는 한국에서 24년간 끊임없이 시도됐다. 의무화한 덕분에 물리적으로 임대 비중은 높아졌다. 하지만 화학적 혼합률은 마이너스다. 착한 정책 의도와 달리 혐오만 조장했기 때문이다. 차별 없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은 약자를 낙인 찍는 좌표가 됐다. 임대동은 외딴 섬이다. 임대주민들은 ‘차별 지옥’에서 살고 있다.

소셜믹스는 한국에선 실패했다. 해외에서 이상적인 정책을 기계적으로 들여온 결과다. 소셜믹스가 안착한 유럽의 정서적 토양은 우리와 다르다. 유럽에선 다른 사람 삶에는 관심 없는 개인주의가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 중 하나는 경쟁이다. 집은 계층을 구별 짓고, 타인과 비교하는 수단이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회에서는 소셜믹스가 태생적으로 뿌리내릴 수 없다.

함께 살 마음이 없는 공간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단지 섞어만 놓는다고 사회통합이 되진 않는다. 접근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사회적 부작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선 소득 수준 하위 70%에 해당하는 시민을 ‘사회주택’에 살게 한다. 입주 대상을 넓혀 임대주택이란 낙인을 없앤 것이다. 사회주택을 무작정 늘리는 대신 저소득층에 주거비 일부를 바우처로 지원한다. 누가 바우처를 받는지 공개하지 않아 차별을 차단했다. ‘익명성’을 보장해 약자를 보호하면서 소셜믹스를 실현한 셈이다.

소셜믹스는 정치인들이 선거용으로 잘 이용해 왔다. 수십 년간 국민을 상대로 한 ‘실험’이 실패했다면 이젠 다른 해법을 고민할 때다. 정책엔 수혜자를 위한 공감과 배려가 담겨야 한다. 위정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소셜믹스를 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권도경 산업부 차장
권도경 산업부 차장
권도경 기자
권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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