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니 시인, 7년만에 신작
세상에 없는 엄마 데려오는 언어
‘되기 연작’ 타자 입장 서려 노력
시어들 스스로 길과 리듬 만들어
과거·현재·미래 겹쳐지는 시간관
순간을 어떻게 살지 성찰할수록
미래 돌보는 수행이란 사유 펼쳐
“나는 언덕의 유품으로 이 해변에 앉아 있다// 언덕은 많지 않은 무언가를 남겼고/ 나는 언덕의 밝혀지지 않은 이웃 중의 하나이다”(시 ‘나의 언덕 위로 해변의 부드러움이’).
이제니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시집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의 첫 장.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라는 문구가 보인다.
시집 속 시어들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머니를 다시 언어 속으로 데리고 오는 중이다. “어리고 여린 돌의 흰 가루. 더는 만날 수 없는 몸의 고운 뼛가루”(‘돌이 준 마음’), “엄마 흰빛을 따라가세요”(‘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등의 시어가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경남 거제시에 머물고 있는 시인은 시집 출간에 맞춰 이뤄진 서면 인터뷰에서 “시 쓰기는 어머니를 기억 속에 보존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언어 안에서 계속해서 만나고 또 만나려는 시도를 거듭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애도란 떠난 이를 과거의 존재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고 했다.
곁에 없는 존재를 매 순간 만날 수 있게 한 것은, ‘시간’이었다. 시인에 따르면, “영원의 세계에서 순환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우리가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이 순간이 이미 여러 겹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머니를 과거의 존재로 지나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호명하고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흔히 과거-현재-미래 순의 선형적인 형태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겹쳐지는 구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는 단순히 우리 앞에 놓인 미지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현재를 깨어 있는 시선으로 사는 일이야말로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돌보고 있는 수행이라 여겨집니다.”
시인에게 그런 시간 앞에 놓인 영원은 분홍빛이다. 시인은 ‘영원은 엷어지는 분홍’에서 “영원은 분홍으로 엷어진다/소멸이 아니라 무한을 향해”라고 썼다.
색채 고유의 정서와 감각에 집중한 시인은 “이 시에서 분홍은 노쇠해가는 육체, 혹은 점점 약해지는 심장의 박동에 반비례해서 점점 더 명료해지고 단단해지는 정신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집은 후반부로 갈수록 ‘되기’의 정서를 짙게 풍긴다. ‘되기-들판의 삼각형’ ‘되기-잿빛 위의 작은 파랑’ ‘되기-그 밖의 모든 것’ 등으로 시가 이어진다. 되기란,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어보려는 시도’다.
“잿빛 위의 작은 파랑은 하나의 언어가 되어 너를 찾아낸다.//…//너는 작은 파랑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다고 느낀다/너는 작은 파랑의 기억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느낀다”(‘되기-잿빛 위의 작은 파랑’)
“시집의 초반부는 상실에 대한 애도와 함께 비선형적 시간성을 미리 불러내는 서문에 가깝다”는 시인은 “후반부의 ‘되기’ 연작 시편들은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움직임 혹은 흘러감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가장 가까운 존재를 끝내 완전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애도의 과정에서 받아들이게 됐고, 그렇게 타자의 자리에 서 보려는, 사물과 존재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과정, 시도 그 자체가 하나의 사랑의 형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시편들의 배치는 사전에 면밀히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쓰인 시들이 스스로 요구한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시인은 시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특유의 움직임과 리듬을 탄생시키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다.
“하나의 낱말 혹은 문장이 떠오르면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내는 방식으로 저의 시 쓰기가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리듬은 의미와 분리되지 않은 채 총체적인 언어적 운동으로 작동합니다. 시를 써 나가는 과정 속에서 제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무의식적 세계를 사후에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인은 침묵의 시간을 거쳐 시집을 세상에 꺼내 놓은 뒤, 찬 바람 부는 거제시에서 다시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한 권의 시집을 엮는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닫는 일이자 또 다른 세계를 여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그 새로운 시간을 미리 엿보면서 이 겨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난 시인은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비롯해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편운문학상, 김현문학패,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은 독자적인 시 세계와 언어감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지현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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