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병소 작가 별세 후 첫 전시

신문에 선 그어 활자 지운 작업

정보의 홍수 속 침묵 택한 저항

고 최병소 작가가 ‘라이프’지 위에 선을 반복해서 그어 완성한 작품.   페로탕 제공
고 최병소 작가가 ‘라이프’지 위에 선을 반복해서 그어 완성한 작품. 페로탕 제공

고 최병소(1943∼2025·사진) 작가의 전시가 20일부터 열린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갤러리 페로탕 서울은 이날 ‘신문 지우기’ 연작으로 잘 알려진 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고 밝혔다. 이 갤러리의 올해 첫 전시이자, 지난해 9월 작가 별세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개인전이다.

최 작가는 신문지나 잡지에 인쇄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볼펜이나 연필을 사용해 반복적으로 지워 나가는 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일종의 수행과도 같았던 이 행위는 이미지와 언어 정보성, 그리고 의미를 해체해 물질로 환원하는 작가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시켰다.

그의 작품들은 “종이를 단순한 지지체를 넘어, 시간과 노동이 축적된 물질로 바꾸고, 재료의 물성과 시각적 밀도를 새롭게 드러낸다”는 평을 받았다.

‘무제(Untitled)’로 명명된 이번 전시는 작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작가는 라이프 지의 상징적 표제인, 빨간 바탕의 ‘라이프’ 글자만 남긴 채, 전체를 새까맣게 칠했다. 이는 모든 것을 지운 것. 또, 마치 서서히 포장을 벗겨 내는 중인 듯, 기사 내용의 일부만을 보이게 한 후 나머지를 지워낸 작품도 있다. 그렇게 작가는 ‘채우면서 비우는’ 구도자로서 살았고, 그 과정은 현존에서 분리됐던 사유와 자각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즉, 이를 통해 작가는 매스 미디어가 끊임없이 생산하고 축적해 온 정보의 체계, 즉, 홍수 같은 뉴스와 광고의 발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검은 신문’들 앞에 서면, 언뜻 그림들은 침묵하기를 택한 듯 조용하지만, 서서히 작가의 단단한 의지가 느껴지고, 이윽고 집요한 물음이 들린다. 그것은 ‘조용한 희열’을 맛보게 하는데, 결국 그의 그리기가 시대와 세태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관람객들은 ‘해방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중앙대 서양화과와 계명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0년대 후반 대구 현대미술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실험적 태도와 독창적 조형 언어를 개척했다. ‘아무것도 없는 그림의 반란’. 즉, 신문에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활자를 지워나간 그의 전매특허 작업은 새로운 시각 질서를 구축했다는 의미에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6·25 전쟁 직후인 초등학교 시절, 신문 용지로 만든 임시 교과서를 사용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검은 신문’ 작품들은 초기 국내 화단에서조차 알아주는 이들이 거의 없었으나 최근 수년 새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에서 앞다퉈 소개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RM과 배우 유아인 등 유명인들의 수집 목록에 추가되며,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2010년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고, 2024년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 ‘서베이(Survey)’ 섹터에 소개되며 국제 무대에서도 주목받았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이스턴 미시간대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3월 7일까지.

박동미 기자
박동미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