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1년 전 젠슨 황 폭탄선언 충격
절체절명 ‘D램 재설계’ 승부수
30년 전 애니콜 화형식 닮은꼴
‘더 크고 더 두꺼운 칩’ 역발상
자신감 되찾고 경쟁력도 회복
새삼 돋보이는 위기 극복 DNA
지난해 1월 7일, 삼성전자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사망진단서’가 날아들었다. 그는 ‘CES 2025’에서 삼성전자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해 “새로운 설계를 해야 한다(They have to do a new design)”고 폭탄 발언을 했다. “새로운 디자인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사실상 HBM 재설계를 요구하며 엔비디아 납품은 한동안 어려울 것이란 의미였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5만5400원으로 바닥까지 내려갔다. 회사 내부에는 패배주의가 만연했다.
반도체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영현 부회장이 비밀리에 결단을 내렸다. ‘5세대 D램(D1b)의 전면 재설계’를 지시한 것이다. 재설계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D1b 재설계는 HBM뿐 아니라 D1b를 기반으로 하는 그래픽 D램(GDDR)과 모바일 D램(LPDDR)까지 모두 바꿔야 하는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는다. 천문학적 매몰 비용에다 개발·양산 시점도 경쟁기업보다 4∼6개월 이상 뒤처지고, 무엇보다 낮은 수율과 품질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에 HBM이 밀린 것도 근본적으로 D램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기존의 D1b로 억지로 만들다간 더 큰 실패를 떠안게 된다고 본 것이다. 솔직하고 과감하게 ‘설계 참사’를 인정했다.
내친김에 지난해 4월에는 아예 ‘6세대 D램(D1c)’까지 재설계하기로 했다. 사실상 D1b를 건너뛰고 D1c로 넘어가는 초(超)강수를 둔 것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한발 앞서 도입했으나 커패시터 리키지(누설 전류)와 낮은 수율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역발상의 승부수를 띄웠다. 재설계에 들어가면서 원가 경쟁력보다 안전성과 수율 확보에 치중하기로 한 것이다. 전류 누설을 줄이기 위해 아예 D램의 크기를 키우고 커패시터 두께도 두껍게 했다. 그동안 더 작게 더 얇게 만들던 것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한 장의 웨이퍼에서 생산하는 칩의 수를 줄이는 어려운 결단이었다. 1995년 3월 19일, 경북 구미에서 열린 ‘(불량) 애니콜 화형식’을 30년 만에 다시 떠올리게 했다.
삼성전자는 ‘고난의 행군’ 1년 만에 다시 위기에서 탈출해 화려한 백조로 떠오르고 있다. 주가는 최근 사상 최고가인 15만 원을 돌파하며 3배 가까이 올랐다. D램 1위 자리도 1년 만에 되찾았다. 단지 반도체 슈퍼 호황 때문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HBM의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끌어올려 지난해 10월 엔비디아 납품에 성공했다. 최근엔 차세대인 HBM4가 엔비디아의 3차 테스트에서 기대 이상의 성능을 보이며 통과했고, D1c의 수율도 손익분기점(50%)을 넘어 60%를 돌파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드디어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20조 원을 돌파해 신기원을 열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무렵 직접 기흥·화성 반도체 캠퍼스를 찾아갔고, D1c 재설계를 주도한 상무를 2년 만에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반도체 경쟁력 회복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지난해 초만 해도 삼성전자는 HBM에선 SK하이닉스에 완패했고, 레거시 반도체인 DDR4 D램도 중국 창신메모리(CXMT)에 덜미를 잡혔으며, 주력 제품인 DDR5 역시 힘을 못 썼다. 2009년 이건희 회장의 “10년 후 삼성이 세계 1위를 하는 제품은 모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불길한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올 정도였다. 반도체는 한번 격차가 벌어지면 다음 사이클 땐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산업이다. 삼성전자가 대담한 승부수를 던지며 1년 만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1등도 졸면 죽는 시대다. 반도체는 초격차를 자랑하다가 한번 삐끗하면 바로 추락한다. 최근 엔비디아 HBM4 납품 테스트에서 다른 경쟁업체가 발열 문제로 재설계 요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행히 올해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강 구도를 형성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국내 정치권에선 ‘K자형 성장’ 우려를 제기하지만, 한마디로 사치다. 반도체의 선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경제 전체가 위험할 판이다. ‘D램판 화형식’을 불사하며 삼성전자가 1년 만에 다시 우뚝 일어섰다. 새삼 삼성의 위기 극복 DNA가 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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