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꺼리고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 앞날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운세나 점괘에 의존하는 행태 역시 낯설지 않다. 이러한 인간의 위험회피적 성향은 일상생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 경영, 더 나아가 법제도의 설계에서도 반드시 고려돼야 할 중요한 출발점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소재 듀크대 로스쿨의 슈워츠 교수는 2009년 발표한 논문 ‘원칙의 역설’에서 추상적인 법규범이 오히려 경영자의 방어적 의사결정을 구조적으로 유도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법규범이 원칙 중심으로 설계되더라도 사후적 소송 위험이 크고 책임의 범위가 불투명하다면 행위자는 그 원칙이 허용하는 재량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선택지만을 반복하게 되고, 그 결과 규범은 본래 의도와 달리 사실상 가장 엄격하고 경직된 규칙으로 변질한다는 것이다. 이는 규범의 유연성을 통해 합리적 판단을 유도하려던 입법 취지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원칙의 역설’은 한국 형법상 배임죄의 운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배임죄의 핵심 구성요건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와 ‘재산상 손해’는 그 외연이 극도로 불명확하다. 무엇이 임무 위배인지, 손해를 어떤 시점과 기준에서 평가해야 하는지는 행위 당시가 아니라 사후적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경영자가 당시로서는 합리적 정보와 절차에 따라 내린 판단이 결과가 나쁘게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범죄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배임죄는 형사법이 가장 경계해 온 결과책임을 사실상 제도화하고 있는 셈이다.
경영상의 의사결정은 본질적으로 위험과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시장 상황의 급변, 기술 혁신의 속도, 경쟁 환경의 변화는 어느 누구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특히, 혁신을 추구하거나 장기적 투자를 감행하는 경우 단기적인 손실이나 실패는 거의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법원이 ‘결과적 손해’에 주목해 경영자의 결정을 형사적으로 평가한다면, 경영자는 합리적 위험 감수 대신 책임 회피를 최우선 가치로 삼게 된다. 외형적인 절차 준수와 보수적인 법률 검토에만 집착한 나머지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할 골든타임을 놓치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극적 경영은 개별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경쟁력 약화는 투자 감소와 일자리 축소로 이어지고, 신산업 진출이 지연되면서 국가 경제 전반의 역동성 훼손으로 이어진다. 결국, 그 부담은 소비자와 근로자, 국민 전체에게 전가된다. 그렇다고 해서 배임죄의 굴레 속에서 몸을 사리는 경영자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형사처벌의 범위와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경영자가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합리적 선택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배임죄를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을 억누르는 ‘혁신세’로 보는 게 마땅하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위험을 회피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법제도 역시 그 성향을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불확실한 책임을 앞세워 도전을 억제하는 형법은 건강한 경제와 양립하기 어렵다. 배임죄 폐지는 기업을 위한 특혜가 아니다. 그것은 형사법의 개입 범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하고, 실패한 판단과 범죄를 명확히 구별함으로써 형사법을 형사법답게 되돌리는 작업이다. 이제 배임죄를 성역으로 남겨둘 이유는 없다. 법치주의의 회복과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그 결단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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