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대답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충동성 강해져 억제 못하면

 

작업기억 능력 떨어지면서

상대방 말 끊으며 끼어들어

 

내 생각 모두 전달하려 말고

새해엔 조급함보다 여유를

매번 새해가 되면 다짐은 하지만,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세우지 않는 편이다.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수많은 새해를 겪으며 깨달았기에, 더는 어리석은 자신에게 기만당하지 않을 만큼의 연륜 정도는 생겼다고 믿기에.

그렇지만 올해는 고치고 싶은 한 가지가 생겼다. 숨넘어갈 듯 빠르게 말하는 습관이다. 나는 말이 아주 빠른 편이다. 급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직업 때문에 생긴 버릇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없고 강의할 내용은 너무 많고, 늘 시간에 쫓기며 서둘러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저절로 말이 빨라졌던 것 같다. 게다가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많으니 나도 모르게 말의 속도에 액셀을 밟았다는 자기변명도 해 본다. 그래서 상대가 느리고 길게 빼면서 천천히 말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없는데, 서론이 너무 길고 빙빙 돌리는 것은 정말 견디지 못한다.

최근에는 더 심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대의 말을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도중에 끊는 것이다. “그래 이렇다는 거지?” “아 이런 건 어때”라고 시도 때도 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나를 발견한다. “미안하지만∼” 하고 형식적인 배려를 할 때도 있지만, 점점 ‘내가 연장자인데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치며 이젠 그런 미안함도 없이 장황하게 떠들고 있다.

성격이 더 급해진 것일까? 남의 말을 끊어내지 않으면 참지 못할 정도라니, 이건 좀 심각하다. 언젠가부터 남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머릿속에 쏟아지는 생각을 붙잡아두기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떠오른 생각이 빠르게 휘발되니 마음은 조급해진다. 아이디어를 놓칠까 봐 두려워서 끼어들고,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른 그 순간 곧바로 말을 하게 된다. 어쩌다 조금 느슨하게 대화한 이후에는 어김없이 후회가 몰려온다. 왜 그때 그 말을 안 했지, 중요한 건 하나도 말하지 못했네,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반의반도 못 했다는 자책감에 ‘이불 킥’ 하는 밤을 맞이하기도 한다.

전문가로서 스스로를 진단해 보기로 했다. 연륜에 따른 자신감 아니면 자만심? 아니면 단순한 노화현상? 결론부터 말하면 기억력의 문제다. 특히, 외부 정보를 받아들여 처리하고, 장기 기억으로 보낼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공간인 ‘작업기억’의 문제다. 작업기억(working memory)은, 대화 상대방의 말을 끈기 있게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 필요한 기억 능력이기도 하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 기막힌 아이디어나 반론이 떠오르면, 그것이 작업기억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어떤 말을 할지를 계획한다. 이때 작업기억 용량이 작은 사람은 상대의 말을 계속 듣는 동시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붙들고 있을 여유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니 작업기억 용량이 포화 상태가 되면, 뇌는 ‘데이터 손실’을 막기 위해 즉각 해결책을 선택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끊고 자신의 정보를 내뱉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작업기억 능력의 저하는 개인의 정서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작업기억의 가장 큰 적(敵)은 불안이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실수하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 데이터가 이 공간을 잠식해 버린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인지적 자원을 잠식해 버리는 것이다. 불안과 긴장이 수행 능력을 떨어트리는 경우를 우리는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화 중에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불안의 정도가 높아지면 이것이 작업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막아 버리거나, 엉뚱한 말을 하게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충동 성향으로 인해 억제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다. 방해하는 자극들을 차단하는 억제능력의 결함이 작업기억 능력의 저하를 일으킨다. 결국, 작업기억 능력은 얼마나 기억에 잘 담느냐보다 필요 없는 것을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억제능력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약해진다.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내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멈추는 필터링 능력이 약해져 ‘억제결함’(Inhibition Deficit)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뇌의 전전두엽 피질(PFC)이 위축되는데 이는 노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위축되는 부위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필요 없는 정보를 억제하지 못하고 상관없는 정보가 자꾸만 작업기억에 침투하게 된다.

젊은 시절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상황에 맞게 억제할 수 있었다면, 나이가 들수록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제어하는 인지적 브레이크가 느슨해진다. 여기에 작업기억 용량까지 줄어드니 절박해질 수밖에. 지금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매너를 집어삼키게 되는 것이다. 고집이 세진 것이 아니라, 생각을 붙들고 있을 기억의 유효기간이 짧아진 셈이다. 공격적인 것도 잘난 척도 아닌, 자신의 빈약한 기억 저장소를 보호하려는 처절한 인지적 방어기제의 작동일 뿐이다.

붙잡을 수 없이 짧아진 기억 안에서 세밀한 의도를 다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몸부림을 한 번 돌아보자. 그래, 일일이 간섭하면서 내 의견을 다 말하지 않으면 어떤가. 흘려보내는 정보가 많아져서 다 기억하지 못하면, 문득 궤도를 이탈한 생각의 파도를 타고 서핑 좀 하다 돌아오면 어떤가. 대화 속 수많은 키워드 중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해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답을 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조급함보다 여유 있는 연륜의 미덕을 펼쳐 보자. 새해에는 꼭 지켜보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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