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 시계를 보니 아직 오늘의 귀퉁이가 조금 남았다, 밤 열한시 오십육분// 이 얼마나 고마운 시간인가, 오늘이 끝나지 않은 것이// 아직 기도할 시간 있는 것이// 시 한 편 읽을 시간 남아 있는 것이

- 정일근 ‘밤 열한시 오십육분의 시’(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겨울이 깊다. 영하 10도 아래의 강추위가 이어졌고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으나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따뜻한 실내에서 일하는 처지라 곤란할 것도 없으면서 이 겨울이 지겹다. 고작 두어 달 지났을 뿐인데. 앞으로 한두 달 더 떨어야 하는데도.

그런 요즘 나는 매사 의욕 없이 지내는 중이다. 무얼 해도 기쁨이 없다. “그런 걸 ‘겨울-우울’이라고 한대.” 선배 시인으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읽고 주억거렸다. 나만 겪는 심정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봄이 올 거”라는 선배의 낙관에 애써 맞장구를 쳐보지만 그리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번 ‘겨울-우울’은 힘이 센 모양이다.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 싶어, 마침 예심위원으로 참여한 올해 신춘문예 시상식을 핑계 삼아 칼바람을 뚫고 한 신문사를 방문했다. 옆자리, 함께 예심을 보았던 소설가가 앉았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심정일까.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셨군요, 인사를 건네자 그는 뜻밖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런 자리에 오면 환기가 되는 기분이에요. 어쩐지 초심을 되찾게 되는 것도 같고.” 과연 그랬다. 새로이 작가라는 명칭을 얻은 이들이 건네는, 하나같이 수줍은 기쁨에 차 있었고 단단한 결의를 다지는 수상 소감을 듣다 보니 가슴 어딘가 뜨거워지는 거였다.

문득, 십수 년 전 저 자리에 섰던 나는 어떠했나 돌이켜보았다. 그저 시를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 없을 텐데. 나는 미루고만 있는 원고를 하나 떠올렸고 얼른 내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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