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초서는 집에 빗물이 샌 흔적”

안진경, 회소의 자만에 일침

 

상황 따라 일희일비 않으며

묵직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날렵하고 굴곡 없는 삶 대신

조금 돌아가는 게 인생 묘미

날마다 초서 연습을 한다. 근래는 당나라 승려 회소(懷素, 725∼785)의 소자(小字) 초서 천자문에 집중해서, 오늘로 열여섯 번째 임서를 마쳤다. 처음엔 ‘자서첩(自敍帖)’이나 ‘성모첩(聖母帖)’ 등 그의 활달한 다른 글씨에 비해 서툴고 버성겨 보이던 천자문의 필획들이 임서한 횟수가 늘어 갈수록 야무지고 단단한 줄을 알겠다. 어깨에 힘을 빼고, 구물구물 흘러갔지만 필획마다 향배가 다르고, 강약과 지속(遲速)의 리듬이 묘하게 살아 있다.

당나라 때 육우(陸羽)의 ‘승려 회소가 안진경과 더불어 초서를 논하다’(釋懷素與顔眞卿論草書)란 글을 찾아 읽었다. 서예로 이름 높던 두 사람이 만나 초서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안진경(顔眞卿, 709∼784)이 회소에게 초서를 쓰며 자득한 지점에 대해 물었다.

회소가 대답했다. “저는 여름 구름에 기이한 봉우리의 형상이 많은 것을 보고 문득 이를 본떠 보았습니다. 그 통쾌한 지점은 마치 나는 새가 숲을 벗어나고, 놀란 뱀이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요. 또 마치 벽이 갈라지며 난 길처럼 획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듣고 있던 안진경이 말했다. “집에 빗물이 샌 흔적(屋漏痕·옥루흔)은 어떤가?” 회소가 벌떡 일어나 안진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得之矣)

여름날 뭉게구름이 피어나 순식간에 기이한 봉우리 모양을 짓는다. 그 천변만화가 어지럽다. 불쑥 솟아 옆으로 흩어지고, 꿈틀꿈틀 퍼지다가 쭉 뻗는 그 기운에서 회소는 초서의 필획을 읽어냈다. 그것은 바람을 맞아 숲을 차고 오르는 새의 궤적, 즉 비조출림(飛鳥出林)의 기세였다가, 놀라 목을 바짝 세웠던 뱀이 스르르 힘을 빼고 풀숲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사입초(驚蛇入草)의 품새로 문득 바뀐다. 또, 흙벽의 균열이 끊어질 듯 이어진 선조(線條) ‘탁벽지로(坼壁之路)’에서 어떻게 해야 획과 획의 연결이 저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 궁리하다가 초서 운획(運劃)의 묘리를 깨달았노라고 했다. 은근한 제 자랑이다. 경쾌하고 매끄러운 붓놀림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완급이 살아 있는 획이라야 초서가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안진경이 슬며시 끼어든다. “집 벽에 비가 새며 흘러내린 자국, 즉 옥루흔(屋漏痕)은 어떤가?” 이 한 방에 회소의 기고만장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지붕에서 샌 비가 벽틈으로 비집고들어 어느 순간 누런 물로 흘러내린다. 스며든 물은 한 번에 곧게 떨어지지 않고 맺혀 기운을 모았다가 천천히 벽의 결을 타고 흐른다. 가다가는 중간에 스르르 멈춘다. 위쪽에서 물기가 더 내려오면 그제야 다시 기운을 뭉쳐 한 번 더 아래로 구른다. 그 획이 직선으로 고를 리 없고, 중간중간 멈출 때마다 툭박진 마디가 져서 자연스러운 굴절과 향배를 이룬다.

그러니까 안진경의 말은 필획이 기세 좋고 날렵·경쾌한 것도 좋지만, 운필에 완급과 지속(遲速)을 섞고, 여기에 강약과 대소, 비수(肥瘦) 농갈(濃渴)의 운용을 엮되 작위하지 않은 천연의 질박함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찔러 말한 것이다.

삶도 그렇다. 늘 날렵하고 경쾌하게 순백의 지면 위를 미끄러져 가기만 하면 굴곡이 없고 마디가 지지 않아 가볍게 날리기 쉽다. 붓이 춤을 추고 먹이 튀는 활기가 좋아도 한 번씩 직수굿이 눌러주는 정지가 있어야 무게가 깃든다. 멈출 데 멈추고 기다릴 때 기다릴 줄 알아야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게가 앉고 깊이가 생긴다. 그 시간을 견뎌 다시 붓끝을 세워 작두를 탈 때 비로소 막혔던 혈도가 풀린다. 획이 날뛰지 않고 날리지 않아 날렵해진다.

여보게! 자네 말대로 초서의 운획이 경쾌해야 하지만 자칫 들떠 날리면 경박함에 떨어지고 마네. 날릴 때 꾹 눌러주고, 튀어 오를 때 꽉 붙들어 줘야 묘미가 있는 걸세. 눙치며 미욱을 떨라는 말이 아니라, 맺히고 풀리는 서슬이 가락을 타야 한단 말이지. 빨리 갈 때 짐짓 늑장을 부리고, 다급할 때 조금 돌아가 보게. 거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다네. 벽에 비집고든 물이 천천히 내려가듯, 달팽이가 제 침을 바르며 벽을 기어오르듯 구물구물 꾸역꾸역 하는 것 속에 답이 있지 않겠는가?

장욱(張旭)은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를 보다가 초서의 묘리를 깨쳤고, 이덕무는 거미줄 위를 겅중대며 가는 거미를 보며 거문고 연주의 묘법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나는 초성(草聖)으로 일컬어지는 장지(張芝)가, 바빠서 편지를 초서로 써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초서가 필기체 속필이지만, 해서나 행서보다 구상에 더 시간이 필요한 글씨라는 말이어서 그렇다. 세상은 쉽고 빠르고 민첩하고 날쌘 것만 좋아하니까 꾹 누르고 가다가 멈추고, 내지르지 않고 멈칫하는 데서 오는 변화, 즉 옥루흔의 자취를 찾아보는 임서가 그래서 더 즐거워졌다.

찾아보니 안진경이 말한 ‘옥루흔’을 두고 고금의 풀이도 제각각이다. 남송 때 강기(姜夔, 1155∼1221)는 ‘속서보(續書譜)’에서 “옥루흔이란 것은 붓을 일으키고 멈춘 자취가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屋漏痕者 欲其無起止之迹)라고 썼다. 입필(入筆)과 수필(收筆), 즉 붓 대고 붓을 거둔 흔적이 없는 초서의 운획이라. 이것은 또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인지 글씨를 쓰다 말고 아득해진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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