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2026년 벽두부터 거대한 행정지도의 재편이 예고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회관계망(SNS) 메시지를 신호탄으로 행정안전부 자문위원회의 행정구역 통합 권고안이 발표됐고, 정부는 수십조 원의 재정 지원을 약속하며 ‘6월 지방선거 전 통합’이라는 유례없는 전격전을 밀어붙이고 있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극복하고 지역 주도의 생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거대 담론에는 공감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하향식 졸속 추진 방식은 자칫 지방자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주민 배제’와 ‘민주적 숙의(熟議)의 결여’이다. 광역단체 통합은 수백만 시·도민의 삶의 울타리를 바꾸는 중대사다. 단순히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을 넘어, 지역의 정체성과 주민의 참정권이 직결된 문제다. 그러나 현재 논의는 대통령의 언급과 시·도지사 간의 ‘정치적 결단’이라는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방선거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에 특별법 제정과 단일 단체장 선출을 밀어붙이는 것은 주민들에게 선택의 기회 대신 ‘기성복’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부가 내세운 ‘재정 지원’이라는 당근 역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4년간 20조 원 규모의 인센티브는 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에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하지만 조세 권한을 이양하지 않는 일시적인 자금 투입은 ‘지속가능한 자치’를 보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중앙정부가 돈을 미끼로 지방행정 체제를 입맛대로 재편하려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으로 산 통합이 과연 지역 간 갈등을 봉합하고 유기적인 결합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6월 지방선거 전 완결’이라는 시한 설정이 졸속 추진의 주범이다. 광역 통합 시 명칭의 결정, 청사 위치의 선정, 권한의 배분 등 결코 녹록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따지고 보면 광역단체장들의 결단은 통합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이를 무시한 채 선거 일정에 맞춰 행정구역을 뜯어고치는 것은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는 ‘게리맨더링’에 가깝다는 의혹만 자초할 뿐이다. 몇몇 외국의 사례를 보면, 충분한 공론화와 주민투표 같은 직접민주주의 절차가 생략된 통합은 이후 극심한 지역 갈등과 행정 마찰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회가 개별 특례법으로 추진하는 것도 문제다. 이 경우 각 통합 시·도들은 더 나은 특혜를 얻기 위해 경쟁할 것이다. 다투어 ‘윗선’ 눈치 보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는 전남·광주, 충남·대전 등 광역단체의 통합을 일반적으로 다룰 기본법을 만들어 이 공통의 기반에서 개별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
지방 소멸 위기 속에서 광역 자치단체 체제의 대형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반드시 ‘주민 주도’여야 한다. 중앙정부는 재정 지원을 당근 삼아 ‘정치적 결단’으로 밀어붙이는 하향식 압박을 멈추고, 지자체와 주민들이 스스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숙의의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행정 체제 개편은 대한민국의 미래 행정지도라는 걸작품이 아니라, 뜻밖에도 지방자치가 퇴보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하는 라틴어 금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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