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5·18 이야기’ 잠시 내려놓은 광주 여행

 

△원도심 온기 느껴지는 충장로

 

1935년에 개관한 ‘광주극장’

과거 영화표·골동품 등 전시

‘손으로 그려낸’ 간판도 눈길

 

서양+일본양식 합친 우체국

만남 장소 ‘우다방’불리기도

 

△ 잊지 못할 과거 간직한 금남로

 

40년 넘은 ‘베토벤 음악감상실’

한때 경영난에 폐업 결정됐지만

시인·철학가 회비 모아 지켜내

 

민주화운동기록관·전일빌딩 등

역사현장 자취 찾는 것도 ‘의미’

팔각정이 있는 향로봉으로 건너가는 지산유원지 모노레일. ‘무등산 모노레일’이라고도 부르지만, 산을 오르는 건 아니고, 협곡에 놓인 레일을 타고 700여m의 구간을 건너간다. 낡고 오래된 레일과 철공소에서 만든 듯한 투박한 차량이 아찔한 기분을 고조시킨다.
팔각정이 있는 향로봉으로 건너가는 지산유원지 모노레일. ‘무등산 모노레일’이라고도 부르지만, 산을 오르는 건 아니고, 협곡에 놓인 레일을 타고 700여m의 구간을 건너간다. 낡고 오래된 레일과 철공소에서 만든 듯한 투박한 차량이 아찔한 기분을 고조시킨다.

광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5·18과 민주화 빼고, 광주 여행

광주의 5·18정신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도시가 겪어야 했던 아픔과 비극,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도시가 그간 바쳐온 고통스러운 희생에 대한 경의를 잊은 것도 아니다.

광주를 여행하면서 5·18과 한국 민주주의를 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5·18은 다른 도시가 갖지 못한 광주만의 자산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무겁다. 어둡고 또, 슬프다. 역사적 슬픔이 깃든 공간을 대면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광주에서 ‘다른 여행’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 이유다. 지금부터는 의무와 부담을 벗고 떠나는 광주 여행 얘기다.

비극적 사건과 역사의 무게감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광주는 흥미진진한 도시다. 광주의 옛 도심에서 주목했던 건 시간이 켜켜이 쌓여 명소가 된 곳이다.

광주우체국, 광주극장, 베토벤 음악감상실, 무등산 케이블카…. 하나같이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져버린 것들이다.

광주 충장로를 기웃거리며 오래된 극장에서 영화를 봤고, 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을 들었으며 충장로 양복점에서 경력 53년의 대한민국 명장으로부터 입지전적 스토리를 들었다.

지산유원지에서는 오래된 유물(遺物) 같은 모노레일도 탔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도 가보고, 조개로 시원한 해장국을 끓여내는 밥집에도 갔다. 상권이 옮겨가면서 헐거워진 충장로와 금남로 골목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광주극장 매표소. 관객과 영화관 직원이 대면하는 곳이다.
광주극장 매표소. 관객과 영화관 직원이 대면하는 곳이다.

# 광주, 그리고 우다방의 추억

광주 번화가 충장로에는 ‘우다방’이 있었다. 우다방은 진짜 ‘다방’이 아니라 ‘광주우체국 앞 계단’을 말한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너도나도 이 계단을 다방처럼 약속장소로 삼아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우다방은 지금도 중년 이상 광주사람들의 공동 기억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우다방만큼 유명했던 건 아니지만 광주에는 ‘나다방’도 있었다. ‘광주 3대 서점’ 중 하나로 꼽힌 ‘나라서적’의 별칭이다. 이곳 역시 단골 약속장소였다.

우다방으로 불린 충장로 광주우체국이 지어진 건 1963년. 전에 있던 서양식과 일본풍의 혼합 양식 우체국 청사를 헐고 다시 지은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새로 지은 청사는 광주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고, 냉난방 시설을 갖춰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약속 장소의 첫 번째 조건은 ‘찾기 쉽고 기다리기 편한 곳’이어야 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때라 커피값이 없어도 되는 우체국이 다방 역할을 대신 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구와 연인의 만남의 장소였던 우다방은, 1980년대에 들어 자연스럽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노의 눈물과 뜨거운 목소리가 모이는 공간이 됐다. 이제는 구세군이 연말이면 이곳에서 의연금을 모으고, 시민단체들은 요구와 발언을 쏟아내는 공간으로 쓴다.

# 우다방의 추억, 그리고 추락

광주우체국은 2012년 대인동 동부소방서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우다방은 ‘광주 충장로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약속장소가 의미 없어진 휴대전화의 시대. 우다방은 이제 아련하고 애틋했던 청춘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우다방이 불러내는 기억은 젊은 시절의 친구, 혹은 사랑했던 연인, 그리고 그 기억의 끝에 젊은 날의 자신이 있다.

우다방이 있는 충장로 일대는 ‘광주의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지역의 최대상권이었다. ‘혼마치(本町·중심거리)’로 불렸던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온 충장로 번성은 100년이 넘는다.

2000년대 초반. 충장로의 추락이 시작됐다. 전남도청의 이전과 함께 외곽 지역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원도심이 쇠락하기 시작했다. 버스터미널이 빠져나간 걸 시작으로 도청과 시의회와 시청이 줄줄이 이주했고, 공공기관과 금융회사 광주 사무소, 호남본부까지 신도시 지구로 빠져나가면서 충장로와 금남로의 쇠퇴 속도가 빨라졌다.

추락은 무차별적이었다. 백화점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노포(老鋪)도, 가성비를 앞세운 프랜차이즈도 소용없었다.

광주극장 내부 공간에 전시해 걸어놓은 외국 여배우 사진. 극장에는 사진, 포스터, 극장표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다.
광주극장 내부 공간에 전시해 걸어놓은 외국 여배우 사진. 극장에는 사진, 포스터, 극장표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다.

# 광주 원도심이 품은 온기

화려한 날의 영광을 뒤로한 채 쇠퇴해 가고 있는 상권의 골목에서 떠올리는 추억은 짠하면서도 쓸쓸하다. 그걸 지켜보는 이가 어느결에 뒷전으로 밀려난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더 그렇겠다.

그런데 광주 원도심의 오래된 공간에는 애잔함과는 종류가 좀 다른 온기가 있다. 이런 따스함은 마음을 다하는 진심과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에서 나온다. 무방비로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도시는 물론이고, 번성하는 도시 번화가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다.

장사가 잘되면 누구나 성실하게 일한다. 노력이 금방 제 이득으로 돌아오는데 왜 안 그럴까. 반면에 잘 안 될 게 분명한 일에 진심을 다하고 성실하기란 쉽잖은 일이다.

좀 더 전망 밝은 일을, 좀 더 번화한 곳을 찾아가서 해야 한다는 걸 그들이라고 왜 모를까. 그런데도 스러져가는 것들을 부여잡고 마음을 바치는 이들이 광주에는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그런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광주의 공간 얘기다.

# 오래된 극장의 총체적 정서

광주에는 광주극장이 있다. 멀티플렉스의 시대에 전국에서 유일한 스크린이 하나만 있는 단관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호남지역 최초 극장으로 1935년 문을 열었다. 9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극장은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박물관의 아우라를 넘어선다.

광주극장은 영화흥행을 뛰어넘어 당대의 대중들이 다양한 의제를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위원회가 광주극장에서 결성됐고, 1948년 전남 삼균학회 주관 백범 김구의 연설이 열렸다.

1948년에는 광주극장에서 일본 선수를 KO로 이겨 동양타이틀을 따고 귀국한 광주 출신 권투선수 문춘성의 시범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판소리와 창극이 무대에 올랐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이미자, 배호 등 인기 가수 리사이틀이 열렸다. 지금 광주극장은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전용관이다.

광주극장이 환기하는 기억과 정서는 총체적이다. 낡은 극장 의자와 오래된 영화, 줄 서서 표를 끊는 매표소, 아무 데나 앉고 싶은 데 앉는 좌석, 손으로 그린 극장 간판…. 극장을 들어서는 순간, 이런 것들에 대한 애틋한 감상이 개인적 추억과 함께 파도처럼 밀려든다.

극장에는 오래된 광주극장 사진과 명작 포스터, 시대별 영화표, 골동품급 영사기, 손으로 그린 영화간판 등이 잘 전시돼 있다. 노트며 엽서 등 자체 제작한 다양한 기념품도 살 수 있다.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특별하다. 극장이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간이란 차원을 넘어, 다른 관객과 동지적으로 영화를 공유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며 무엇보다 감회가 깊었던 건 어두운 상영관과 차가운 좌석 팔걸이, 이른바 ‘도기다시(테라조)’ 바닥과 특유의 극장 냄새에 이르기까지 광주극장의 모든 것들이 다 ‘진짜’라는 거다.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거기서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엄연한 ‘현역’이다.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을 타고 건너가는 향로봉에 세워진 ‘팔각정’. 무등산 팔각정이라는데, 정작 무등산 정상은 등 뒤로 아주 멀다.
지산유원지 모노레일을 타고 건너가는 향로봉에 세워진 ‘팔각정’. 무등산 팔각정이라는데, 정작 무등산 정상은 등 뒤로 아주 멀다.

# 극장을 지켜낸 건 지극한 성실함

처음 광주극장을 찾았을 때의 얘기다. 극장 앞에서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걸 본 극장 안의 매표소 여직원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표를 사지 않아도 누구든 극장 안을 구경할 수 있다”고 들어오길 권했다. 전해준 주의 사항은 딱 하나. “영화상영 중일 때 상영관 문을 열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굳이 문밖까지 나와 이런 얘길 하는 직원에게서 느껴졌던 건 극장을 제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가 보여준 건 자기가 간직한 귀중한 것을 꺼내어 보일 때의 자부심과 비슷했다.

극장운영을 이끌고 있는 김형수 전무이사를 비롯해 광주극장에서 일하는 7명 구성원 모두에게서는 비슷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광주극장을 지금껏 지탱해온 두 축 중 하나가 고향사랑기부제로 기부금을 모으는 극장을 아끼는 광주시민들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구성원의 자긍심과 ‘전망 없는 일’에 대한 지극한 성실함인 듯했다. 쇠락한 것들을 내다 버리는 게 결국 ‘주인’이라면, 광주극장의 이런 자부심은 광주극장이 ‘지속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극장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김 전무는 ‘광주극장 100년’ 얘기를 꺼냈다. 개관 100년까지 앞으로 9년. 김 전무는 “100년 된 영화관을 지켜야 한다는 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소임”이라며“극장을 찾는 관객과 내부 구성원들이 서로 감성을 나누는 관계로 확장하고 있다는 데서 ‘100년을 맞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한옥과 일본식,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돼 지어진 주택을 개조해 만든 광주 동구인문학당 내부. 누구든지 이 공간에서 가져온 차를 타서 마실 수 있다.
한옥과 일본식,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돼 지어진 주택을 개조해 만든 광주 동구인문학당 내부. 누구든지 이 공간에서 가져온 차를 타서 마실 수 있다.

# 음악감상실을 지탱해온 것

충장로에 광주극장이 있다면 금남로에는 베토벤 음악감상실이 있다. 1982년 YMCA 뒷골목 건물 4층에 문을 열었다가 1987년 5월 막 신축한 금향빌딩 6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유한 제재소 집 아들이었던 김종성 씨가 지금의 자리로 음악감상실을 옮긴 건, 순전히 해 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무등산 경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건물을 관리하던 건물주의 모친과 그만 시비가 붙게 됐다.

최적의 음악감상을 위해 거금 8000만 원을 들여 바닥을 나무흡음재로 채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는데 건물주 모친이 ‘새 건물을 다 망쳐놓았다’며 불같이 화를 냈던 것. 마음 여린 김 씨는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다.

이전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김 씨는 음악감상실을 당시 단골손님이었던 이정옥(70) 씨에게 헐값에 넘겨주곤 그 길로 미국 이민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서른두 살 나이에 갑작스럽게 음악감상실을 떠맡은 이 씨는 칠순이 되도록 음악감상실을 지키고 있다.

한때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폐업을 결정한 적도 있었는데, 이 공간을 아끼는 이들이 소식을 듣곤 십시일반 회비를 모아 폐업을 면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씨도 힘에 부친다. 음악감상실을 더 이상 지탱해나가기 어려운 사정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그때마다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

이 씨는 음악감상실에 남은 시간은 ‘길면 5년 짧으면 3년’이라고 했다.

베토벤 음악감상실은 거의 모든 것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다. 창의 형태부터 벽돌로 마감한 장식벽까지 그대로 보존해왔다. 그게 자기에게 음악감상실을 넘긴 창업주에 대한 예우라 생각해서다.

1987년 문을 연 음악감상실을 예전 모습 그대로 간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토벤 음악감상실이 보유한 스피커는 영국의 ‘3대 빈티지 스피커 브랜드’ 중 하나인 로저스다. 소리의 밀도감이 좋고, 따뜻하고 섬세한 브리티시 사운드로 유명한 스피커다.

베토벤 음악감상실의 스피커를 손보는 건 광주 반도상가의 ‘명신전자’ 나 사장이다. 나 사장이 없었다면 음악감상실은 더 일찍 문을 닫았을지 모른다.

오래된 것들은 모두 다 그걸 귀하게 여기는 이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남아 있다. 낡았다고, 쓸모를 잃었다고 허투루 볼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충장로 ‘전병원양복점’에 전시해놓은 시대별 양복 변천사.
충장로 ‘전병원양복점’에 전시해놓은 시대별 양복 변천사.

# 충장로 노포가 품은 사연

광주 충장로에는 노포가 많다. 광주에 30년 넘는 가게가 160여 곳쯤 된다는데 그중 120곳이 충장로에 있다. ‘대한민국 명장’이 운영하는 충장로 ‘전병원양복점’도 그중 하나다. 중간에 상호를 바꾸긴 했지만, 1987년 개업했으니 양복점은 노포 반열에 거뜬히 오른다.

전병원 사장은 호남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패션 디자인부문 명장(名匠)이다. 그가 명장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노고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이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양복점에 들어갔다. 바로 위 형이 고교 재학 중이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들 둘을 가르칠 여력이 안 됐다. 어머니는 “기술을 배우며 1년만 지내면 형이 졸업하니까, 그때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달랬다. 다 거짓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는 아들의 중학교 졸업 두어 달 전부터 철공소와 이발소, 자전거포 등을 다니면서 시장조사를 했단다.

학교를 보내는 대신 기술을 가르쳐야 했는데 왜소한 체격의 아들이 걱정된 어머니는 ‘고생하지 않는 일’을 찾았다.

어머니가 낙점한 건 흰 와이셔츠를 입고 일하는 양복점이었다. 무작정 찾아가 간청한 끝에 양복점에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을 보낼 수 있었다. 1972년 1월 2일. 아들은 54년 전 첫 출근 날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던데다 1년만 지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일을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월급만 받고 시간만 보내는 날이 계속됐다.

그러다 TV에서 세계기능경기대회 양복 부문 금메달 수상자들의 귀국 장면을 보게 됐다. 공부가 아니라도 존경과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 장면이 그의 삶을 바꿨다. 목표가 생기자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쉬는 날이면 내로라하는 최고 기술자들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꿈꿨던 세계기능경기대회 출전은 미처 몰랐던 나이제한 규정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다른 목표가 생겼다. 패션디자인 부문 명장이었다.

명장 타이틀에 도전한 그는 7번 떨어지고 8번째 도전 끝에 땄다. 2년에 한 번 명장을 뽑으니 첫 도전에서 명장 타이틀을 얻기까지 꼬박 16년이 걸렸다. 양복쟁이 경력 42년째 되던 해였다. 전 사장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을 학교가 아닌 양복점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가 누구보다 더 좋아하셨다”고 했다.

전병원양복점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적잖다. 광주로 여행 왔다가 옷을 맞춰가는 고객도 있다.

그는 치수를 재며 고객에게 늘 직업을 묻는다. 직업에 따라 움직임이 다르니 거기에 맞춰 옷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늘 자기가 만드는 옷을 입는 이들을 생각한다. 똑같은 체형이라도 그가 만드는 영업직과 내근직의 옷이 다른 이유다.

충장로에 즐비한 노포에 이만한 사연 하나쯤 없는 곳이 있을까. 한복집 ‘부영상회’도, 2대째 가업을 잇는 ‘영안반점’도, 1978년 문을 연 ‘일신모자’도, 1986년 개업한 ‘동성주단’도 어려웠던 시절을 건너오면서 겪은 뭉클한 사연 몇 개쯤은 다 품고 있다. 격동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모두들 그렇게 살았던 세월이었다.

■ 레트로 감성 ‘지산유원지’

무등산 아래 광주의 지산유원지는 한 세대 전 과거를 박제해 놓은 것 같은 곳이다. 지산유원지에는 1978년 개장과 함께 운행을 시작한 2인승 리프트와 1980년 설치된 향로봉 정상 팔각정으로 건너가는 모노레일이 있다. 지산유원지는 개장 당시 광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던 곳인데, 지금은 이색적인 분위기나 ‘레트로’ 공간을 즐기는 이들만 간혹 찾아드는 곳이 됐다. 모노레일을 타고 건너가는 향로봉에서는 광주 전역의 모습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박경일 전임기자
박경일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5
  • 감동이에요 1
  • 화나요 0
  • 슬퍼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