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 ‘북극항로’
(1) 정부, 차세대 쇄빙선 건조사업 본궤도
4년후 1만6560t급 쇄빙선 투입
아라온호보다 연속적 쇄빙 가능
부산 ~ 로테르담 ‘베링해협’ 항로
수에즈 운하보다 9000㎞ 짧아
5000 TEU당 약80만 달러 절약
부울경, 핵심기지 조성 역량결집
항만·에너지·조선 등 벨트 구축
24일 부산서 2026지역혁신포럼
대전·부산=이승륜 기자
지난달 28일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 빙해수조 실험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이곳에서는 국내 첫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쇄빙선 개발을 위한 빙해수조 모형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가로 42m·세로 32m·깊이 2.5m 수조에 두께 67㎜(실제 북극 얼음두께는 1.5m 상당), 강도 500kPa(1년생 해빙)의 얼음을 만들어 전차·센서·비전카메라로 모형선의 속도와 빙저항을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22.4분의 1 축소 모형선은 얼음에 올라타 눌러서 깨는 ‘피칭 현상’을 보이며 전진했고, 연구원들은 속도·추진력·프로펠러 토크와 쇄빙 패턴 분석을 통해 실제 얼음을 몇 노트로 깰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 연구진은 “아라온호가 1m 두께를 3노트로 깬다면 차세대 쇄빙선은 1.5m 두께를 연속적으로 깨는 것이 목표”라며 “2029년 건조 후 성능 검증을 거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차세대 쇄빙선은 2022∼2029년 추진되는 국가 핵심 극지 인프라 사업이다. KRISO 검증을 거쳐 북극 고위도 진입이 가능한 LNG·디젤 이중연료 쇄빙연구선을 건조해 극지연구소가 운항하게 된다. 2030년 차세대 쇄빙선이 투입되면 연간 연구항해가 최대 277일로 늘어나고, 1.5m 두께 해빙을 돌파하는 1만6560t급 성능으로 기존 아라온호보다 쇄빙력과 연구 역량이 크게 향상된다. 현재 실시설계를 진행 중이며, 올해 10월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부는 이와 함께 북극항로 상업화에 대비한 ‘친환경 쇄빙 컨테이너선 기술 개발’ 과제도 기업들과 병행 추진하고 있다.
특히 극지 조선·설계는 한국의 강점이 될 수 있다. 연 2조∼3조 원 규모의 쇄빙선 시장은 배 가격이 일반 상선의 2배에 가깝고 유지·보수·운영(MRO)까지 연계된다.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은 각각 쇄빙·LNG 운반선·쇄빙 유조선 분야 경험을 축적했다. 전문가들은 KRISO의 빙해수조 같은 극지 선박 실험 인프라가 관련 기술 자립을 위해 중요하다고 본다. 정성엽 KRISO 책임연구원은 “극지 운항 선박 설계·실험 능력이 없으면 유럽에 의존하게 되고 기술 유출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와 기업이 북극항로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기후 변화가 있다. 북극해 얼음이 줄어들면서 북극항로는 수에즈 운하에 의존하던 아시아∼유럽 물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고, 부산·울산·경남이 항만·에너지·조선 기능을 나눠 맡을 경우 새로운 성장 축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5일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북극항로는 더 이상 먼 미래의 바닷길이 아니다. 특히 기존 해상 물류망이 잇따라 흔들리면서 북극항로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2021년 좌초 사고와 최근 홍해·수에즈 일대 무장 공격 위험으로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는 항로는 비용과 시간이 모두 증가했다. 반면 부산∼로테르담 북극항로는 총연장 약 1만4000㎞로 수에즈(2만3000㎞)보다 9000㎞ 짧고 5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하기·추기 기준 비용도 약 300만 달러로 수에즈(380만 달러)나 희망봉(417만 달러)보다 낮게 추산된다. 다만 운항 시기는 일반 상선이 다닐 수 있는 7∼10월과 내빙·쇄빙선이 필요한 6·11월로 제한적인 게 단점이었는데, 정부는 해빙이 더 진행되면 운항 기간도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각국은 이미 북극항로를 실제 물류에 활용하고 있다. 중국 하이제해운은 정기노선을 개설했고 뉴뉴쉬핑은 러시아와 함께 상하이(上海)∼북극∼아르한겔스크 노선을 확대했다. 러시아는 39조 원 규모의 북극항로 개발 계획을 승인하고, 1500명이 접속 가능한 디지털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 항로를 국가 전략 물류망으로 관리한다. 여기에 러시아 연안을 지나는 북동항로 구조, 국제 금융 제재, 중유·블랙카본 규제까지 더해져 북극항로는 기술·제도·외교가 함께 얽힌 전략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출발이 뒤처진 게 사실이다. 2022년 북극해를 오간 1661척 중 러시아 국적이 885척, 한국은 22척에 그친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대외적 조건 속에서 정부는 해양수산부와 관련 공공기관을 부산에 집적하고 해사법원 설치, 해양금융 확대, 한국해양진흥공사 자본금 10조 원 확충과 동남권 투자 기능 강화를 통해 해운·보험·법률 기반을 키우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동시에 쇄빙선·자율운항선박·극지 기자재·친환경 에너지·자원 개발·해양관광을 연계한 산업 육성과 부산·울산·경남 트라이포트 및 광역철도망 구축을 추진하고, 올해 부산∼로테르담 시범 운항으로 데이터를 확보할 방침이다. 또 러시아 제재 해제 이후를 대비한 북극권 자원조사와 북동항로 활성화도 검토 중이다.
이 과정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역할도 뚜렷해지고 있다. 부산은 항만·해양금융·디지털 관제, 울산은 친환경 연료 허브, 경남은 쇄빙·내빙선과 MRO·기자재 산업벨트를 맡아 역할을 나누며, 세 지역이 협력하면 항만·에너지·조선·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북극 경제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엄지 KMI 극지전략연구실장은 “북극항로는 해빙 조건과 운항 기간, 제도와 경제성의 불확실성이 큰 만큼 친환경 연료와 벙커링, 데이터·디지털 시스템, 금융·보험, 인력과 지역 협력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륜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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