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훈민정음도 백년간 찬밥 신세

관료들이 공식 문자 채택 반대

AI 시대 국가 역할에 시사점

 

자율성 없는 곳에 혁신도 없어

정부 反시장 정책 번번이 실패

전략산업 관여 곳곳에 문제점

학술회의 참가차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인 학자가 휴대전화로 문자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고 새삼 놀랐다.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되지만, 일본어 입력은 음을 자판에 치고 맞는 단어를 골라야 하니 매우 번거로워 보였다. 훈민정음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새삼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한글이 탄생했지만, 사회경제 변화의 원동력이 되기에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이 중화 중심의 질서와 관례를 해칠 뿐만 아니라 얕은 지식의 벼슬아치를 양산해 학문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관료들은 한자를 국가의 공식 문자로 만들기 위한 제도들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저항했고, 그 결과 훈민정음 반포 후 100년이 지난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민간에서 한글을 이용한 다양한 서적이 나올 수 있었다.

최근 관세로 대표되는 국제 정치경제의 새로운 흐름과 산업 경쟁력이 화두가 되면서 과거 관료의 잔재가 부활하는 듯하다. 안보와 전략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가졌는데,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급격히 작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발효된 ‘인공지능(AI) 기본법’과 올해 반도체·AI 분야에 대한 투자 예산을 보면, 정부는 유럽연합(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AI 기본법을 제정했다는 자부심에 더해 규제보다는 진흥에 무게를 두고 법을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한다. 과연 국가가 문명 전환기의 시장과 사회에 대한 명확한 예측, 정책의 비전과 능력을 갖췄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국가는 시장을 예측하고 기술 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반복적 실험과 실패가 중요한 기술 개발의 과정에서 국가가 방향을 정하는 순간 기술 혁신은 행정 절차에 묶여 버릴 것이다. 시장을 고려하지 않은 국가 주도 정책은 반복적으로 실패해 왔다. 대표적으로, 집값을 잡겠다는 명분 아래 수십 차례나 대책을 쏟아냈지만, 특정 지역의 가격 폭등과 국민의 상실감 및 계층 갈등만 키운 부동산 정책이 있다. 또, 경직적인 교육정책으로 교육 소비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교육 현장, ‘근로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추진됐지만, 영세 자영업과 고용 취약층의 부담만 키우며 오히려 고용의 문을 좁힌 노동정책도 있다.

국가 개입의 비전과 능력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 미래의 방향을 올림픽 빙상경기처럼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포괄 규제를 시작했다고 속도를 강조할 사안은 아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산업, 그리고 기업을 우선적 규제 대상으로 인식하는 국가는 시장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율성이 없는 곳에서 혁신이 자라난 경우는 드물다. 통제로 단기적 질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장기적 경쟁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개발국가 모델의 성공과 한계를 모두 경험한 나라다. 변화의 속도가 어느 때보다 빨라진 지금, 가장 변화에 둔감한 관료 체제가 혁신의 방향을 좌우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실패의 유령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전략산업 투자도 국가가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개입하느냐’가 중요하다. 국가가 방향을 제시하고 위험을 분담시켜 주는 것과, 특정 기술과 기업의 활동 방향을 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가 기업가적 국가라면, 후자는 계획국가에 가깝다. 이미 정부의 모호한 기준과 과도한 규제로 오히려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AI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터져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단순한 민원 접수만으로도 AI 사업자에 대한 현장조사를 할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인력이 제한적인 스타트업에는 사실상의 업무 마비를 초래하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급속히 발전하는 AI 시대에 경계해야 할 대상은, 시장이 아니라 능력을 과신하는 국가다. 달리 말하면, 통제의 칼을 휘두르는 국가가 아니라 경쟁과 창의와 자율이 발현될 환경을 조성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지금 절실한 것은, 자주·애민·실용의 훈민정음 정신과 한글의 탁월함을 발굴하고 발전시킨 개방·혁신의 유전자(DNA)를 계승하는 일이다. 이것이 시장 자율성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혁신을 이루는 제3의 길이다.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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