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

딥테크 분야에서 스타트업 투자를 10년 넘게 해오며 반복적으로 마주한 장면이 있다. 기술은 분명 뛰어나고, 창업팀 역시 사업에 진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이 시장 진입의 문턱에서 멈춰 서버렸다. 이들을 막아선 것은 기술의 완성도가 아니라, 기술이 산업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구조적으로 닫혀 있었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좋은 기술은 끝내 하나의 산업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 기업의 실패를 넘어 생태계 차원의 손실로 이어진다. 기술은 쌓이지만 기업은 자라지 못하고 산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장에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은 ‘풀 스택(Full Stack)’ 회사의 중요성이었다.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고 수요처와 실증·양산·시장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함께 설계할 수 있어야 기업은 비로소 성장 궤도에 오른다. 예컨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국내 자동차 산업을 떠올려보면 답은 분명하다. 엔진·전장·소재 기술이 각각 존재한다고 해서 산업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완성차 기업이 수요와 양산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 위에 수많은 부품·소재·장비 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모험자본의 시각에서 본다면 단순한 명제다. 시장의 크기가 곧 기업의 크기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기업은 커질 수 없다. 반대로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미숙한 기술이라도 그 안에서 진화한다. 그래서 기술 중심의 논의만으로는 산업을 만들 수 없고 항상 시장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에 수립·발표된 산업통상부의 ‘산업 연구·개발(R&D) 혁신방안’은 반가운 방향 전환으로 읽힌다. 특히 ‘수요앵커기업 주도 프로젝트’는 R&D를 산업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하려는 시도다. 수요앵커기업이 협력사를 직접 선정하고 필요한 기술 수준과 검증 기준을 처음부터 제시하는 구조는 R&D 방향을 시장과 정렬시킨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가 1조 원 규모의 ‘사업화 펀드’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R&D와 자본이 하나의 경로로 이어졌다. 현장에서는 기술 검증이 끝났지만, 양산 과정에서 투자를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까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병목을 공적 자본이 앞장서는 구조는 산업 생태계가 갈망해 온 방향과 맞닿아 있다.

물론 설계가 곧 성과는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방향이다. 기술이 산업으로 연결되고 글로벌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이번 정책 개편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며 잠재력 있는 기업들이 시장이라는 넓은 바다로 건너갈 수 있는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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