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채의 인문 디톡스 - (3)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할까 : 플라톤의 ‘국가’

 

“나의 올바름은 타인에게만 이익”

지식인 트라시마코스, 비관론 내세워

 

소크라테스는 ‘올바름’ = ‘좋음’ 주장

현자 군주가 독재 군주보다 729배 더 행복 느껴

“지혜와 용기가 인간을 충만케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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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누구에게나 가슴을 찌르는 질문들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살아온 방식의 허술함,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일까. 부끄러움은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위험하다. 보통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란 도덕적 감수성의 최저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제대로 뉘우치는 고백의 기록들은 많은 사람에게 윤리적 지진을 일으키곤 한다.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토설하는 남다른 정직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사람이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그 답을 찾는 데 시종하는 책이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이 국가(원제 폴리테이아라는 말은 국가 운영의 체제 곧 정체라는 말이다)일까. 국가 운영의 방식을 따져보는 일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내용과 제목이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외관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면 현실에서 당면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이율배반이 핵심에 놓여 있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 제대로 된 세상인데, 그 반대되는 경우가 많아 보여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2. 플라톤의 ‘국가’는 당연히 철학으로 분류되는 책이지만, 플라톤의 저작 일반이 그렇듯 우리가 아는 통상의 이론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소설이라 해야 마땅한 형태이다. 플라톤의 책이 대화편으로 불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마치 녹음 파일을 풀어 옮긴 것처럼 책으로 썼다. 그러니까 첫 느낌은 소설 같은데, 풍경이나 행동 묘사가 없어서 매우 긴 드라마 대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녹음기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이런 정도로 디테일을 갖춘 대화 채록이 가능했을까. 저작의 양을 고려한다면 허구와 윤색이 없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런 플라톤이 바로 이 책에서 ‘시인추방론’이라는 문학(예술) 부정론을 펼쳤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책의 초두에서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 트라시마코스가 나서서 말한다. 나의 올바른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이익이 되고, 반대로 올바르지 않은 삶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즉, 들키지 않을 만큼 영리하거나 혹은 아주 힘센 사람이라서 아무도 제재할 수 없다면, 올바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매우 냉소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아는 현자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이런 말에 반박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젊은 청년 둘이 트라시마코스의 뒤를 이어 이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곧이곧대로 올바른 삶이 아니라 평판을 관리하면서 적당히 위선적으로 사는 삶이, 현실에서 훨씬 대접받고 유복한 결과를 낳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플라톤의 두 형이기도 했던 이 청년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주문한다. 올바르게 사는 게 왜 유익한 것인지를 말해달라고,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증명해달라고.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이 주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3. 덕과 복의 불일치는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우리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이다. 올바른 사람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옳지 않은 사람이 지상에서 복을 누리는 현실은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부조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 자식들에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씩씩한 청년 글라우콘은 좋음을 셋으로 구분하여 소크라테스에게 힐문한다. 그 자체로 좋음(기쁨과 즐거움)과 결과 때문에 좋음(건강, 지혜), 수고로운 좋음(신체 단련, 돈벌이)이 있는데, 올바름이 유익함이자 좋음이라면 이 중에서 겨우 세 번째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냐고.

올바르게 사는 일은 자기 욕망과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힘든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글라우콘은 투명인간 반지의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그런 반지를 얻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완벽하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법망을 피할 수 있다면, 그때도 과연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할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자기에게 좋은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올바름이란 그 자체로 좋음이자 또한 결과 때문에 좋음이라 답하고, 두 청년에게 이를 증명한다. 그것을 위해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언어가 소요되었다. 그것이 곧 ‘국가’라는 책이다. 다섯 가지 정치 제도며, 특유의 이상 국가 이야기는 이를 위한 예로서 필요했을 뿐이다.

4. 올바름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결국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까. 소크라테스가 먼저 동원하는 것은 영혼이 느끼는 행복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참된 즐거움은 무엇인가. 사람의 영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지혜를 원하는 머리, 용기를 원하는 가슴, 충족을 원하는 배. 이 셋이 조화로울 때 사람의 영혼은 구족하여 올바른 상태가 되며 그것이 곧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

소크라테스는 또 다섯 가지 정체, 이상적인 현자정체, 용감한 명예정체, 부자들의 과두정체, 평범한 자유민들의 민주정체, 그리고 독재자가 다스리는 참주정체를 제시한다. 이들은 각각 지혜, 용기, 재산, 자유, 욕망에 의해 구동되거니와, 곧바로 영혼의 상태에 대한 비유가 되어 사람의 행복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지혜로운 현자정체 인간, 승리를 원하는 명예정체 인간, 재산의 축적을 원하는 과두정체 인간 등등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참주정체 인간의 영혼이 행복에서 가장 멀다는 사실이다. 강력한 참주는 두려움과 굴종과 아첨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지만, 영혼의 현실로 보자면 참주의 영혼은 오히려 두려움과 굴종과 아첨의 노예에 다름 아니다. 그는 질투하는 영혼이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영혼이며, 제멋대로 구니 친구도 없고 경건하지 않으니 온갖 악행으로 둘러싸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현자정체의 군주가 참주정체의 군주보다 729배 즐겁게 산다고 말한다. 올바른 삶은 그 자체로 영혼의 행복이자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족했을까.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올바름이 얻게 되는 사후 세계의 보상에 대해 말한다. 전쟁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보았던 저승 이야기를 마지막에 덧붙인다. 사람이 죽으면 초원의 야영장에 있는 심판대로 가서, 생전에 한 일에 따라 천상과 지하로 구분되는 길을 따라 열 배의 보상과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상세한 디테일로 펼쳐진다. 이런 모습은 그보다 2000여 년 후의 철학자 칸트에게서도, 또한 보편 종교들의 가르침에서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증명할 수 없지만, 반증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윤리의 잉여는 그저 신앙의 영역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문학평론가

■ 인물 설명

플라톤 (BC427∼348)

서구 철학의 아버지에 해당한다. BC399년, 28세였던 플라톤은 70세였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10년 넘게 지중해 연안을 떠돌다, 40대 초반에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우고 교육과 저술 활동을 한다. 그가 남긴 대화편에 그 자신은 배역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과 독약을 받는 날의 장면에 엑스트라처럼 거명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사랑했던 스승의 사형 언도와 죽음 장면에, 임종도 하지 못한 자기 이름을 꾸역꾸역 적어 넣고 있는 것이다. 전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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