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진 피아니스트,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다름은 속도·크기 문제이지만

개성은 오래 쌓인 경험의 결과

 

연륜 깊어지면 침묵·여백 늘어

음악은 조금씩 덜어내는 예술

 

연주가 좋으면 연주자 보이고

정말 좋을 땐 작곡가가 생각나

요즘 연주를 들으며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연주자에게 정통에 충실한 연주보다 색다른 해석을 더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을까.’ 이 변화는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변했고, 예술이 놓인 환경도 달라졌다. 연주자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고, 곡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연주자마다 개성이 더욱 뚜렷해졌고, 청중으로서는 연주의 풍경이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이 변화가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같은 작품을 들어도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음악회는 이전보다 훨씬 역동적인 공간이 되었다. 연주자는 더는 정답을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담아내는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덕분에 클래식 음악은 과거의 음악이 아닌, 여전히 동시대의 청중과 깊이 호흡하는 예술로 남아 있다.

그러나 변화가 늘 그렇듯,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주가 점점 더 빠르고 강한 소리로 향하고 있다는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작곡가의 의도보다 연주자의 개성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점점 더 많아졌다. 실제로 10여 년 전에 발매된 음반과 최근의 음반을 비교해 보면, 요즘 음반은 기본 음량 설정부터 훨씬 강하게 되어 있다. 같은 작품을 들어도 호흡의 여백은 줄어들고, 긴장과 압박은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귀로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변화다.

이런 연주를 들으며 연주가 끝난 뒤, 이상하게도 공허함이 먼저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순간적으로는 강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사회가 점점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주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빠른 속도와 강한 이미지, 즉각적인 반응이 일상이 된 환경 속에서, 예술 또한 그 언어를 닮아가고 있다. 깊이보다 주목이, 여운보다 반응이 먼저 요구되는 시대에서 음악만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의 속도를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 한 번쯤 멈춰 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교육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혼란스러워진다. ‘창의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창의력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나 역시 늘 확신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운 태도를 갖게 된다. 연주자에게 자유가 주어질수록, 선택의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고 어디서 물러설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그래서 결국 나는 ‘개성’과 ‘다름’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름은 비교적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빠르거나, 크거나, 예상과 다른 방식의 해석은 단번에 이목을 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개성은 의도적으로 연출한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쌓인 경험과 생각이 마음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가라앉으면서 만들어지는 결과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연주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소리의 크기나 속도가 아니라 선택의 깊이에서 결정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음을 어떻게 대하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느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문제다. 문학과 철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적 경험들이 음악과 만나 마음속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 연주는 비로소 소리를 넘어선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이 지닌 의미를 이해할수록,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사실 클래식 음악은 그 이름 그대로 고전이다. 고전이 지닌 가치는 과시라기보다 오랜 세월 견뎌 온 진정성에 가깝다. 이 진정성은 쉽게 대체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존중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들어 이러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연주를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수록 작품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작품 앞에서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 조심스러움이야말로 고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연주에서 무엇을 더 보여줄 것인지보다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에 더 마음이 간다.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전달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쉽게 지나쳤던 침묵과 여백이,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의 중심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음악은 더해가는 예술이 아니라, 덜어내며 본질에 가까워지는 예술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말년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나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들려주던 연주가 유난히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들의 연주에는 화려함도 과시도 없었지만, 한 음 한 음에 삶의 시간이 스며 있었다. 더는 증명할 것이 없기에 가능했던 그 절제와 여백 속에서, 음악은 오히려 더 깊은 이야기를 내게 걸어왔다.

더 빠르고 더 큰 소리로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는 음악보다,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며 작품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연주를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연주가 좋으면 연주자가 보이지만, 연주가 정말 좋으면 작곡가가 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다음 세대의 연주자들에게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감각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김대진 피아니스트,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대진 피아니스트,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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