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서재

영화 ‘파반느’의 시사회가 있던 날, 집을 나서기 전 주섬주섬 몇 권의 책을 골라 가방 속에 담았다. 삼성동 영화관 앞에 도착한 내게 상영 전까지 주어진 건 어림잡아 세 시간. 무엇보다 홀로이니 더 아리랑 했던 나. 순간 초콜릿 바 ‘자유시간’이 언제 처음 출시된 건가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1990년이라 하고, 그걸 참 야무지게 먹은 게 시 동아리 사람들과 시집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1996년 겨울 산행을 했던 소요산 꼭대기에서의 기억이다 싶으니 별안간 센티멘털해져서는 들어선 카페에서 마시고 떠드는 일로 바쁜 사람들 한가운데 나는 시집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아무 구절이나 삼켜도 왜 아무냐고 왜 내뱉냐고 누가 뭐랄 것도 없고 내가 뭐랄 것도 아닌 책. 줄거리 요약이나 가르침 받아적음이나 실생활 써먹음 같은 목적으로부터 어쩌면 가장 멀리 달아나 있는 책. 무엇을 하겠다고 속으로 먹는 마음이 ‘뜻’이라 할 적에 그 경직된 주먹으로부터 제일 멀고 먼 데서 ‘따’를 당하고 있는 책. 그렇게 멀고 머니 그만큼 아무와도 닿지 않으니 진짜 외따로이 고독한 데서 ‘따뜻’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우게 하는 책. 시집이라는 책. 그리고 오늘 내가 읽은 시집은 곽은영의 ‘퀸 앤 킹’이라는 책.

영화의 힌트는 책이었고 음악이었고 편지였고 청춘이었고 사랑이었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어떤 다급함에 미쳐 내가 한 일은 가방 속에서 시집을 꺼내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시를 찾는 일이었다. 처음이라는데 사랑이라는데 시라는데 때문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 보태고 무슨 말을 더 뺄 수 있을까. 이 한 편의 시를 사진으로 찍어 너에게 불쑥 보내는 밤이었다. ‘첫사랑’ 전문이다.

두려웠기 때문에/갑작스러웠기 때문에/내가 먼저 너를 떠났기 때문에/내가 배워야 했기 때문에/우리가 순수했기 때문에/아직 눈물이 부족했기 때문에/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우리의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그러나 감정의 온도가 뜨거웠기 때문에/너를 몰랐기 때문에/나를 몰랐기 때문에/용기가 있었기 때문에/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그러나 가장 행복할 때 끝났기 때문에/여전히 아름답기 때문에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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