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일행의 잘못은 아니다. 시원한 맥주가 생각 나서 세 사람이 맥줏집을 찾았다. 생맥주 관리가 시원치 않은 집이라 병맥주를 주문했는데 잔 하나에 금이 가 있다. 20대 초반의 ‘알바’를 불러 ‘새 잔 주세요’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친구는 거품이 찰랑대는 생맥주 세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새 잔 달라고 한 건데요?’라고 했더니 이 친구 대답이 가관이다. 그럼 ‘쌔 잔’이라고 하셔야죠!

어이가 없다. 방언 전공자에게 ‘에’와 ‘애’의 구별은 필수이니 정확하게 ‘새’라고 했다. 셋을 가리키는 ‘세’는 장음이니 이와 구별되도록 짧게 ‘새’라고 말했다. 어두에 된소리를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쳐 왔으니 ‘새’를 ‘쌔’로 말할 일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이미 시킨 병맥주가 남아 있는데 굳이 생맥주 세 잔을 더 시킬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건 분명히 우리말도 잘 못 알아듣고 눈치도 없는 젊은 친구 잘못이다.

그래도 고맙다. 말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말의 변화를 생생하게 알려주었으니. ‘에’와 ‘애’를 구별할 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어졌다. 그러니 ‘그런대 왜?’와 ‘걔는 왜 그런데?’에서 ‘그런데’와 ‘그런대’가 반대로 쓰인 것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일ː(事)’과 ‘일(一)’은 길고 짧음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면 ‘꼰대’가 되어 버린다. ‘새 잔’보다는 ‘쌔 잔’이 더 ‘쌔것’처럼 느껴진다고 우긴다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선술집에서 사기대접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던 시대에서 ‘호프집’에서 얼린 유리잔에 따라주는 맥주를 마시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 세월의 길이만큼 말도 많이 바뀌었다. ‘곶’과 ‘불휘’가 ‘꽃’과 ‘뿌리’가 되었듯이 좀 더 세월이 흐르면 ‘새’도 ‘쌔’로 발음해야 할지 모른다. 말의 타락을 막고 바른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와 그 변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이가 싸우다 보니 세 잔과 쌔 잔의 맥주가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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