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국제부장
英은 러시아 부동항 확보 저지
日은 러 막고 조선 지배권 확보
조선은 판세 못 읽고 멸망의 길
중국을 1도련선에 가두려는 美
전쟁 가능 국가 노린 다카이치
한국은 卒과 騎士 선택의 기로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운 영국과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러시아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곳곳에서 충돌했다. 이 두 강대국 간의 충돌,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은 1853년 크림전쟁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 50여 년간 이어졌다. 영국은 이 기간 자국군은 물론 프랑스나 오스만튀르크, 일본 등 동맹국이나 우방을 동원해 러시아의 남진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떠오르기 시작한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 협정이 체결된 뒤에야 막을 내렸다.
지구라는 거대한 체스 판에서 펼쳐졌던 그레이트 게임이 120년 만에 다시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자신의 패권에 도전하려는 중국을 제1 도련선 내 가둬놓으려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포기하고 중국 억지에 주력하는 것으로 전략 전체를 수정했다. 이 전략의 구상자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이 지난달 방한과 최근 뮌헨 안보회의에서 언급한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국제 체제 구조가 신흥 강대국에 패권 도전을 숙명처럼 강요한다는 신현실주의, 그럼에도 강대국의 행보는 국내 정치 상황과 지도자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신고전현실주의가 중국과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콜비 차관의 유연한 현실주의는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을 보여준다.
콜비 차관은 세계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이라는 인식, 그러나 미국이 과거처럼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국내 상황을 직시하고 있다. 이에 중국을 억제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우크라이나전쟁·가자전쟁)에 발을 깊이 담그지 않는 대신 동맹에 더 많은 역할을 강요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러한 역할 분담이 중국과 근접한 동맹국인 한국, 일본에 더욱 크게 가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국의 압박에 일본은 120년 전 영국과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 때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을 대신해 동아시아에서 남하하는 러시아를 패퇴시켰다. 이를 계기로 비서구권 국가 중 유일하게 강대국의 대열에 올라선 것은 물론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조선 지배를 서구 열강들로부터 인정받았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의 최근 움직임은 과거 일본의 기민함을 다시 보여주는 듯하다. 올해 초부터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으로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더니,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것을 계기로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교전권과 군 보유를 금지한 헌법 개정에 조만간 나설 뜻을 분명히 했다. 10년 전 자신의 정치적 스승인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미국의 중국 억지 전략 핵심이 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제시한 데 이어 이를 바탕으로 다시금 일본이 군사 강국으로 나갈 길을 착실히 다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을 막는 미국의 전사가 되겠다는 일본의 움직임에 미국이 “일본이 강하면 아시아에서 미국도 강해진다”(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고 반응하고 나선 것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다.
과거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 달리 그레이트 게임 판을 읽지 못했다. 판세를 보지 못하니 청과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시간만 보내다 체스 판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버리는 말로 전락했다. 120년이 지난 현재 우리 정치권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진 그레이트 게임의 판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콜비 차관은 14일(현지시간) 포린폴리시 편집장과의 대담에서 한국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에 설정한) 새로운 글로벌 기준인 국내총생산(GDP)의 3.5% 국방 지출을 약속한 첫 번째 비(非)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콜비 차관의 칭찬에 미국의 요구를 만족시켰다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미국은 증액된 방위비로 북한 억제에서 한국군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중국을 제1 도련선 내에 묶는 임무도 맡을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버려지는 ‘졸(Pawn)’이 될 것인가, 판을 흔드는 ‘기사(Knight)’가 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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