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타이드, 사상의 썰물과 밀물 - (7) AI 무한경쟁 시대, 우리는

 

기술·경제 넘어 주권·정체성으로 격상한 인공지능

선진국만 추격하던 한국엔 공포의 ‘막차티켓’ 같아

적응 못하면 도태?… 문제제기 봉쇄땐 AI에 지배 당해

인간·에너지 등 5개 축 맞물려야 비로소 대전환 가능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초과학기술 신문명시대, 눈 깜빡할 새 페이지가 넘어가는 인공지능(AI)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습니다.”

지난해 6월 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대통령은 취임사 후반부에서 “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와 지원을 통해 미래를 주도하는 산업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11월, 국회 시정연설에서는 2026년도 예산안을 “AI 시대를 여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예산”으로 명명, ‘AI’를 24차례나 언급했다. 또 지난해 9월 제8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선 “‘모두를 위한 AI’의 비전이 국제사회의 뉴노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여유 자본을 남김없이 투자해 반드시 가야만 할 길로 여겨지는 AI. 그 길의 끝에서 ‘세계’ ‘한국’ ‘우리’는 각종 위기의 터널을 기적처럼 빠져나와 웃을 수 있을까.

세계적인 환경과학자이자 경제사학자인 바츨라프 스밀은 현대사회를 ‘낮은 출산율, 풍족한 먹거리, 막대한 에너지 소비, 세계화된 경제, 높은 이동성, 실시간 소통’이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는 저서 ‘무엇이 대전환을 만들었는가’에서 인구·식량·에너지·경제·환경이라는 다섯 가지 대전환을 따로 떼어 보지 말라고 주문한다. 전환은 한 기술의 등장과 발전으로 완결되지 않았고, 세계는 다섯 축이 서로를 조건으로 삼아 동시에, 느리게, 거칠게 맞물려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이 같은 시각을 오늘의 현실에 대입하면 질문은 분명해진다. AI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 변화는 수십 년 내에 막대한 화석연료 기반 탄소 배출을 대체하면서, 100억 명에 이르게 될 세계 인구에게 충분한 식량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연간 100조 달러를 웃도는 규모의 생산을 실제로 떠받칠 수 있을 것인가. 스밀이 강조하듯 전환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규모의 문제이기에 특정 영역에서 관찰된 가파른 진보를 문명 전체의 전환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그 순간, 기대는 허무맹랑한 환상으로 변질된다.

또 다른 저서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서 그가 특이점 담론을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AI의 시대’라는 자기 확신 속에서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가 무엇이었는지 건조하게 드러냈다. 문제 해결을 가로막은 결정적 병목은 연산 능력이 아니라 공급망과 병상, 마스크 같은 물질적 기반이었고,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대응은 거리두기와 이동 제한, 백신을 둘러싼 신뢰의 붕괴였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AI는 물론, 기술낙관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 가설 위에 서 있는가 다시금 깨닫게 된다. 환상은 언제나 빠른 결말을 약속하지만, 그 끝은 공허하다. 현재 상황에선 AI가 세계의 구원자라는 주장의 근거는 빈약해 보인다.

◇이미 도래한 구조적 위기

“철강, 자동차, 기계, 석유화학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들이 우리나라 부가가치의 27∼28%를 차지해 왔죠. 이 산업들이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AI와 기후 분야 전문가인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소장은 AI 논의에 앞서 한국 경제가 처한 현재의 조건을 먼저 짚었다. 한국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탄소집약적 산업은 생산성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고, 중국과의 본격적인 경쟁 국면에서 압박은 더 커지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의 침체는 이런 한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긴박함 속에서 AI는 ‘유일한 돌파구’로 여겨진다.

◇AI에 대한 희망과 불안, 공포

AI가 한국 사회에서 유독 강한 기대를 받는 이유를 기술문화 연구자인 박승일 캣츠랩 소장은 ‘성장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찾았다. “한국은 한 번도 선진국이었던 적이 없는 추격 국가였습니다. 식민지 경험, 전쟁, 빈곤의 기억이 사회에 응축돼 있습니다.” 그 결과, ‘탈락하면 끝’이라는 정서가 한국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AI는 이런 불안을 흡수하며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다. 박 소장은 “AI는 거부할 수 없는 막차 티켓처럼 인식된다”며 “밥을 먹을까 말까는 선택이 아니듯, AI도 선택이 아닌 문제처럼 다가온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의 성공 경험이 AI 담론에 투사되며 AI는 기술이나 경제 문제를 넘어 주권과 정체성의 언어로 격상된다. 이때 AI에 대한 믿음은 희망이면서 동시에 불안이다. 성장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빈곤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AI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효율과 비용 뒤에 숨은 것들

하지만 AI를 강조할수록 중요한 비용들은 감춰진다. 김 소장은 “AI 논의 이전에 에너지 정책과 전력 수급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뿐 아니라 냉각을 위한 물, 설치를 위한 토지까지 요구한다. AI 투자를 강조할수록 그에 앞서 전환돼야 할 기반인 에너지 정책과 산업 정책 사이의 모순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박 소장은 앞선 스밀의 주장에 효율의 함정을 더해 설명했다. “기술 효율이 높아질수록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 이게 윌리엄 제번스의 역설입니다. AI도 이 역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더 세련된 기술일수록 더 많이 쓰이게 되고, 그만큼 기후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여기에 AI 학습과 운영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인간 노동도 있다. 박 소장은 “데이터 라벨링, 사후 조정, 혐오 필터링 같은 AI 작업들은 값싼 노동에 의존한다”며 “이 과정은 제3세계의 노동 착취, 아동 노동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박 소장은 “사용자는 말끔한 결과만 보지만, 그 뒤에 있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환의 시간, 지금 해야 할 일

그렇다면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김 소장은 AI를 부정하기보다, 그것을 하나의 날개로 보되 다른 날개를 함께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태양전지, 풍력 터빈, 배터리, 전기차, 히트펌프 같은 녹색 제조 분야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을 제외하면 이 정도의 녹색 제조 역량을 가진 나라는 사실상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AI와 결합하되, AI만으로는 부족하고, 녹색 전환과 제조 역량이 함께 갈 때 제조업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를 위해 공공의 역할과 사회적 합의, 예측 가능한 정책 환경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박 소장은 마지막으로 사람의 자리를 물었다. “AI는 자본 수익률을 소수 기업에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입니다.” 그가 진정한 의미의 러다이트를 다시 불러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러다이트는 무지한 파괴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술 도입의 속도와 방식, 그 사회적 비용에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말로 모든 문제 제기를 봉쇄하는 순간, 기술이 인간 위에 서게 된다는 경고다.

분명 한국은 AI라는 심대한 전환 앞에 서 있다. 그것이 한국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지는 아직 열려 있는 문제다. 두 전문가의 진단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에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다.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

■ 참고

■ 바츨라프 스밀

에너지·환경·식량·인구·경제·공공정책·역사를 넘나들며 50여 년간 연구를 이끌어온 환경과학자이자 경제사학자. 캐나다 매니토바대 환경지리학과 명예교수로, 체코 출생 후 프라하 카를로바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수학했다. 세계 에너지·환경 정책 자문에 참여했으며, 사실 기반 데이터와 통계로 현대 문명의 구조를 해부하는 저작으로 빌 게이츠가 가장 신뢰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 AI특이점

인공지능(AI)이 인간 지능을 넘어 스스로를 개선하며 기술 발전이 통제하기 어려운 속도로 가속되는 전환점. 경제·노동·정치·안보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다만 실제 AI 발전은 에너지, 연산 자원, 데이터 품질, 제도와 규제 등 현실적 제약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 김병권 소장은

녹색전환연구소 소장. 연세대 화학과 졸업 후 10여 년 동안 디지털 분야에서 일했다. 석사는 경제학, 박사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서울시 혁신센터장과 협치자문관으로 일하며 지역의 혁신과 협치 현장에 참여했다. ‘기후를 위한 경제학’ ‘AI와 기후의 미래’ 등을 집필했다.

■ 박승일 소장은

독립 연구단체 ‘캣츠랩’ 소장. 서강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미디어융합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기계, 권력, 사회’와 ‘기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를 펴냈다.

장상민 기자
장상민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