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쌍투스 ‘그 시절 그 노래’

‘긴 머리 소녀는 길가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젊은 연인들은 모두 밤 배를 타고 연갈 불렀지’(쌍투스 ‘그 시절 그 노래’) 35글자에 노래 제목 6개가 일렬횡대로 섰다. 7080 동창 모임이라면 자막 도움 없이도 합창이 가능한 노래 목록이다. ‘긴 머리 소녀’ ‘길가에 앉아서’ ‘편지’ ‘젊은 연인들’ ‘밤 배’ ‘연가’

백투더뮤직.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1995년 10월 14일 이화여대 대운동장으로 직행한다. 토요일 뉴스데스크 끝나고 밤 9시 40분부터 생방송 대학가요제. 참가번호 1번은 대학 연합동아리 쌍투스. 5명 중 유일한 여학생이자 작사·작곡을 담당한 이영미(이대 정외과)는 (이 노래를 부르려고 일부러 길렀는지는 모르겠으나) 긴 머리 소녀였다.

무반주로 남성 솔로가 차분하게 노래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젠 모두 싫어해 다들 잊어버리고 살아 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아 먼지 쌓인 노래’ 중앙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긴 머리 소녀가 포효한다. 카메라도 함께 춤춘다. ‘다 변했어. 요즘에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정신없어’ 가창력은 결국 호소력인데 PD도 스태프도 관객들도 정신없이 노래에 빠져든다. 갇혀있던 호리병 속에서 지니처럼 노래들이 잇달아 탈출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이 되어서야 잔잔하게 합창으로 갈무리한다. ‘마음만은 자유롭던 그 시절 그 노래를 우리 모두 사랑해’ 마지막 12번 에밀레(서강대 남성 4인조)가 없었다면 대상이 분명한데 쌍투스는 아쉽게(?) 금상을 수상했다. 아무튼 그날의 디바는 명실상부 이영미였다.

대학가요제는 나의 첫사랑 같은 프로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그날(2월 20일) 시간은 나를 신도림역에 있는 아트센터로 내몰았다. 제자들과 함께 뮤지컬 ‘데스노트’를 보기로 한 날이다. 출연자 명단을 보다가 짧게 한숨이 나왔다. 31년 전 긴 머리 소녀가 (머리 색깔만 바뀌었을 뿐) 거기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가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혹시라도 문전박대하는 건 아닐까. 아니었다. “PD님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익숙한 거짓말에 나도 여유롭게 반응한다. “너도 완전 그대로다. 다이너마이트 노래 실력도 그대로”

시간은 흘렀지만 떠밀려 흘러간 노래는 없다. 흘러온 노래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시간을 보낸 것 같지만 실은 시간이 우리를 보낸 게 틀림없다. 겨울의 끝자락(2월 22일) 오후 강남 모처에서 ‘긴 머리 소녀’가 다시 울려 퍼졌다. 놀라지 마시라. 그 소녀를 부른 사람들의 면모가 엄청나다. 전설의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가 후배들이 마련해준 팔순 잔치에서 답가로 이 노래를 부른 거다. ‘개울 건너 작은 집의 긴 머리 소녀야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원곡 둘 다섯 ‘긴 머리 소녀’) 연예계에도 진정한 우애가 있음을 증명한 그날의 마지막 헌정곡은 ‘붉은 노을’이었다. 이문세는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열창으로 두 선배를 감전시켰다. ‘저 타는 노을 붉은 노을처럼 난 너를 사랑해’

‘TV는 사랑을 싣고’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자신이 찾는 사람의 이름을 3번 부르는 장면이다. 한 번 불러서, 아니 두 번 불러서 나오는 일은 결코 없다. (빨리 나가고 싶어도 조연출이 무대 뒤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세 번 부르면 그제야 나와서 포옹하고 흐느낀다. 그때 나오던 음악이 바로 셀린 디옹의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가 또 있는데 그 노래는 바로 영화 ‘백투더퓨처’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돌아갈 순 없지만 돌아볼 순 있다. 돌아보면 거기 그 시절 그 노래가 있고 그 옆엔 전하지 못한 사랑이 있다.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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