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7000 단어의 짧은 보고서 하나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제임스 반 길런이 세운 미국의 시트리니 리서치가 내놓은 ‘2028년 글로벌 지능 위기’다. ‘오늘 아침 발표된 실업률은 10.2%로 예상보다 0.3%포인트 높았다….’ 2028년 6월의 어느 하루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한 다른 보고서와 결이 달랐다. 인공지능(AI)이 화이트칼라를 몰아내고, 이로 인해 소득과 소비가 줄어들면, 결국 금융 시스템 붕괴와 경제 위기로 이어진다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AI를 혁신의 도구가 아니라 파괴자로 그린 것이다. AI 디스럽션(disruption·파괴적 변화) 충격으로 IBM이 13% 폭락하는 등 미 증시가 요동쳤다.
곧장 음모론이 퍼졌다. 보고서 필자 중의 한 명이 몇몇 기업에 공매도를 걸어놓은 사실이 드러났다. 차익을 노려 극단적 공포를 조장했다고 사방에서 수군거린다. 또, 실업률이 높아지면 노조가 반발하고 정부도 실업 구제에 나서기 마련이다. 이런 인간과 사회의 대응을 생략한 채 “진공 상태의 시나리오”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미 백악관이 정면 대응에 나선 것도 눈길을 끈다. “흥미로운 공상과학소설(SF)일 뿐 경제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 피에르 야레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 대행은 공식 인터뷰를 통해 “비현실적 소설”이라 못을 박았다. 단지 증시 패닉을 진정시키는 차원을 넘어 사전에 정치적 파장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자칫 ‘2028년 대공황’ 시나리오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실패로 연결되지 않게 미리 선을 그으려는 계산이다.
이에 대해 길런은 “역사는 항상 ‘SF’처럼 시작되었다”고 반격에 나섰다. “과거 인터넷, 증기기관, 전기 등 거대한 기술적 변곡점이 처음 닥쳤을 당시에도 똑같이 ‘비현실적 상상’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는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먼저 보고 경고하는 ‘파수꾼’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맞선다. 오픈AI, 엔비디아 등은 AI가 인간을 도와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처럼 낙관적 전망을 쏟아낸다. 반면, 앤스로픽의 ‘클로드 코워크’ 때문에 소프트웨어 업계가 쑥대밭이 되는 디스토피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누구도 AI의 발전은 막기 어렵다. 다만, 어떻게 AI를 다룰 것이냐를 놓고 인류사적 거대 담론이 불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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