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주필

 

보수 정치의 근본은 애국주의

친일파 독재자 비난 듣더라도

시대적 과제는 차질 없이 수행

 

선거 승리와 집권이 최고 목표

편협한 배타적 행태는 反보수

늦기 전에 野 지도부 책임져야

한국 보수 정치의 뿌리는 150여 년 전 개화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세계 질서에 강제 편입되기 시작한 1860∼1870년대에 위정척사·동학·개화사상의 세 흐름이 태동했다. 유교 질서와 성리철학(正學)을 지키고 천주교와 서양 학문(邪學)을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는 민족주의, 동학사상은 평등주의와 민중주의, 개화사상은 자유민주주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개화파들은 일본과 달리 입헌군주정 전환에 실패했다. 대한제국은 황제 권력을 절대화한 전제군주정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다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5년 투옥 뒤 특별사면으로 석방,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에 앞장섰다. 박정희는 매국노 소리를 들으면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강행하고, 미국 용병 비난에도 베트남 파병을 실행했으며, 그렇게 해서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소양강댐 등 산업화 기반을 구축했다.

건국·산업화 세력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쳐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세력과 결합했고, 김영삼 정권으로 이어졌다. 1998년 김대중 집권 때까지 국가 주류 세력이었으나 시대 변화에 뒤처지면서 날개 없이 추락 중이다. 유구한 역사를 돌아본 이유는 보수 세력이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 세력이 부강한 나라를 지향한다는 진정성만은 의심받지 않았다. 친일·독재 비난을 받으면서도 할 일을 했고, 다수 국민은 믿고 지지했다.

보수 세력은 시대 요구에 선제 대응함으로써 파괴적 변혁을 예방한다. 집권이 존재 이유나 다름없다. 선거 승리를 위해 과감한 노선 변경이나 지지 기반 갈아타기도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는 이념이 아니라 행동 철학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 보수당은 주류가 지주에서 산업 세력으로 바뀌었고, 정치적으로 불리함을 알면서도 선거권 확대를 피하지 않았다. 미국 공화당 역시 당대 최고의 진보적 가치이던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을 불사했고(에이브러햄 링컨), 대기업의 독과점 규제와 노동권 및 환경 보호에도 앞장섰다(시어도어 루스벨트).

보수 정치가 시대를 관통해 사랑받는 것은 이런 애국주의 때문이다. 한국 보수 정치 위기는 이런 근본을 잃어버린 데서 출발한다. 진보적 가치를 앞세우는 세력과 달리, 국가의 중심을 자임하는 보수 정치의 확고한 존재 이유는 집권이다. 선거 승리를 도외시한 보수 정치는 시민운동일 뿐이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범위한 선거 연합에라도 나서야 할 판인데, 유력한 비주류를 내친다. 미국 공화당과 일본 자민당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코커스와 파벌이 있지만, 자해적 제명을 하진 않는다. 텐트 안에서 바깥으로 오줌을 누게 하는(pissing out) 것이 반대 경우(pissing in)보다 낫다는 미국 정치 격언이 잘 말해준다. 선거 패배 전망이 뚜렷한데도 분열을 계속한다면, 어떤 말로 포장해도 보수 정치에 대한 배신이다.

이런 측면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보수의 죄인’이다. 비상계엄으로 자폭한 것으로도 모자라 ‘윤 어게인’ 세력을 부추긴다. 최고 권좌에서 쫓겨난 정치 실패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이젠 지나간 일이다. 당장의 책임은 현재의 보수 정당 지도부에 있다. 남 탓을 해선 안 된다. 오직 성과로 말해야 한다. 선거 승리와 더 멀어지는데, 패배 땐 책임지겠다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 사악한 행태다. 튀는 비주류를 끌고 가는 것도 당권파의 책임이다. 수십만 아스팔트 보수도, 기독교 보수도, 자유대학 청년들도 소중한 자산이지만 이들에게 휘둘려선 안 된다. 5200만 국민, 4400만 유권자의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 승리의 확신을 만들거나, 그럴 자신이 없다면 자리를 내놓고 권한을 넘기는 게 옳다.

집에 불이 나면 집주인은 물 한 동이라도 더 퍼붓고,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라도 소방 호스를 빌려온다. ‘불이야’라고 외치기만 한다면 구경꾼이다. 자기주장만 내세움으로써 지지 기반을 좁히는 구경꾼 보수는 ‘보수의 배신자’, 반대 진영에서 볼 때는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다. 소신을 일부 양보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는 보수가 보수의 주인이고 진짜 보수다.

이용식 주필
이용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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