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전 서울대 교수
미뤄둔 책장 정리하려고 보니
차마 버릴 수 없는 책이 많아
1980년대 종로서 산 ‘천자문’
어머니 손길 닿은 ‘백과사전’ …
책장은 ‘살아온 인생의 거울’
결국 정리 못 했지만 추억 소환
이번 겨울 로드아일랜드에 10여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학교는 이틀 동안 휴교를 했다. 제설 작업도 애를 먹었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은 혹한이었다. 매일 동네를 산책하는 나로서는 답답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미뤄둔 책장 정리를 하기로 했다. 산책처럼 운동이 되는 건 아니지만, 옛 추억을 돌아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다.
오래전 읽었거나 앞으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웬걸, 그 기준은 이내 무너졌다. 오래된 책 중에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한국어 공부를 위해 종로서적에서 구입한 ‘천자문’은 당시 그 서점의 종이 커버로 싸인 채로 있었다. 그 무렵 종로서적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장소였다. 책도 많이 봤지만, 그 앞에서 친구도 많이 만났다.
일본어를 먼저 공부해서 한자는 이미 접했지만,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공부하면 더 효율적으로 단어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천자문’을 샀다. 하지만, 옥편을 보는 일이 훨씬 더 많아 ‘천자문’은 거의 보지 않았다. 얇은 책이라 몇 번의 이사 때에도 부담이 없어 그대로 두었다가 오늘날까지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오래된 데다, 앞으로도 거의 읽을 것 같지 않으니 버려야 하는 책에 포함된다. 이번엔 꼭 버려야지 했는데, 예쁜 종이 커버를 보는 순간 내 인생사의 유물 같아 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이 책장에 꽂혀 있다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러다가는 끝이 안 날 것 같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준을 수정했다. 참고서와 사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이미 2000년대부터 참고서보다 인터넷 검색 중심으로 정보를 얻었고,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정보가 더욱 풍부해졌다. 종이 사전을 사용한 지 오래고, 이미 많은 걸 정리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책장에는 몇 권이 남아 있다. 취미이기도 한 자연 관련 컬러 참고서가 눈에 띄었다. 잎의 모양으로 나무를 소개하는 구성의 책인데 컬러 이미지가 언제 봐도 예쁘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다. 북미 동부지역의 새에 대한 백과사전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책이다. 펼쳐본 지 오래지만,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책이라 버릴 수가 없었다. 기준이 또 무너졌다.
이튿날, 새로운 각오로 정리를 시작했다. 개인사와 별로 관계가 없는 책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걸로 기준을 바꿨다. 진도가 조금 더 나가긴 했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2000년대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 외국인 노동자의 일본어 습득과 문화적 적응이라는 주제를 연구했다. 그때 본 책들을 정리할까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요 몇 년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외국인 밀집 지역의 언어 사용 현황에 관한 연구를 하는 중인 데다, 올해도 양국을 방문해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라 관련 책들을 버리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한 권씩 꼼꼼하게 살펴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판단하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긴 하겠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우선은 모두 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1980년대 말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작품을 찾아서 읽었다. 역사적 배경을 알기 위해 여러 책을 읽었고, 대개는 정경대 후문 앞에 있던 동방서적에서 샀다. 주인아주머니는 항상 책을 비닐로 포장해 주었는데, 책장에 몇 권이 있었다. 바로 그 비닐로 커버가 된 ‘한국문학사’를 발견하곤 다시 읽어 보고픈 생각이 들어 그냥 두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기준을 바꿔,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거나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책은 버리기로 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한 권씩 검색하면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비교적 많이 정리했다. 나중에 다시 보고 싶어지면 비용이 들더라도 간편하게 전자책으로 볼 수 있다고 마음을 달랬다. 옛날 책은 글자가 더 작고 읽기 힘든 것도 있으니, 확대해 볼 수 있는 전자책의 장점으로 위로를 삼았다.
결국, 책장 정리는 뜻한 만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가를 정리하면서 옛 추억과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책장의 책은 그냥 ‘책’이 아니다. 살아온 인생의 거울이다.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한번 맺은 인연은 끊기 어렵고, 나이 들면서 새로운 의미도 생긴다. 추운 날씨에 모처럼 마음먹고 시작한 책 버리기가 잘 안 된 것은 책과의 인연이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이 평생 이어지는 건 아니다. 사노라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인연이 다하는 이들이 있다. 옛날 사진 속에서 함께한 추억과 기억은 남아 있지만, 이름조차 잊어버린 사람도 많다. 책장도 그렇다. 이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하기도 하고, 기부나 나눔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내 손을 떠난 책들 중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도 많다. 그렇게 생각하니, 책장 정리를 다시 해 볼 엄두가 난다. 이번에는 어떤 기준을 세우지 말자고 생각한다. 애초에 목표와 기준 같은 걸 두지 말고 책 표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보겠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다시 책장 정리를 해 보려고 한다. 과연 이번에는 책장 정리를 시원하게 마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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