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Window - 정치양극화·경제위기로 번지는 ‘권력 대물림’
필리핀의 마르코스·두테르테家
식민지때 富 독점한뒤 정치 장악
태국 친나왓家·인니 수카르노家
정책 사유화로 권력독점 악순환
수해에 쓸 돈 빼돌리는 등 부패
권력싸움에 내수·관광산업 타격
세계 각지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자)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일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일부 정치 가문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상황이 여전하다. 식민 지배 시절 토착 엘리트가 진화한 ‘정치가문’에 의해 정경유착, 가문 간 합종연횡 등이 난무하며 정치양극화가 심화되고 정치 위기가 경제 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대물림되는 권력… 아시아 곳곳 고착화된 가문정치= 정치권력이 특정 가문에 집중된 국가일수록 정치직 세습 비율도 높게 나타난다. 마르코스와 아키노, 두테르테 가문이 정권을 번갈아 장악하고 있는 필리핀이 가장 대표적이다. 필리핀 탐사보도센터(PCIJ)의 분석에 따르면 2025년 선거에서 주지사의 87%, 지역구 하원의원의 80%가 정치가문 출신으로 나타났다.
인도네시아, 태국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소수 정치가문의 권력 장악이 두드러진다. 수카르노와 조코위 가문으로 대표되는 인도네시아의 경우 현재 하원(DPR) 전체 의원 580명 중 128명(약 22%)이 전·현직 고위 정치인이나 지역 유력자의 직계 가족 및 친인척인 것으로 집계됐다. 태국의 경우, 약 20년간 장기집권해 온 친나왓 가문이 이끌던 프아타이당이 지난달 8일 총선에서도 2023년 총선에 이어 참패하며 그 위세가 줄긴 했지만 지역 정치가문들이 인프라·개발 예산을 쥔 핵심 부처를 두고 경쟁하는 가문정치 구도는 여전하다.
방글라데시에서도 두 정치 가문의 여성 정치인들이 40여 년간 최고 권력을 두고 대립을 이어왔다. 이른바 ‘베굼들의 전쟁’으로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끈 초대 대통령의 장녀인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와 방글라데시 전쟁 영웅이자 대통령이었던 지아우르 라만의 부인 칼레다 지아 전 총리가 그 주인공이다. 보수적인 이슬람 전통과 가부장제가 강한 국가에서 여성이 정치인의 직계가족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쥘 수 있을 만큼 방글라데시에서도 가문정치가 두드러진다.
◇식민지 시절 형성된 토착 엘리트… 정치·경제 권력 독점 악순환= 동남아시아 정치가문 상당수는 식민지 시절 부와 권력을 축적한 토착 엘리트 세력이 식민 통치가 끝난 후 권력 공백 속에서 독립 국가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으며 형성됐다.
필리핀의 정치가문은 스페인 식민 시대의 토착 특권층인 ‘프린시팔리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토지와 부를 독점하며 대지주 계급으로 성장했고, 이후 미국 식민지 시기 도입된 서구식 선거 제도하에서 부를 활용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며 지역의 실질적 정치권력인 ‘카시케’가 됐다.
인도네시아도 정치가문 상당수가 과거 식민지 시절 토착 세력이었던 ‘프리아이’ 계급에 기반을 뒀다. 필리핀의 카시케가 토지를 기반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면 인도네시아의 프리아이는 네덜란드 식민 시절 확보한 관료 조직과 정치권력으로 부까지 독점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광업, 팜유 등 1차 산업 분야에서 인허가 여부가 중요한 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경제적 부로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세습되는 가문정치의 그늘… 민주주의 훼손= 정치가문의 비대한 권력은 선거를 허울뿐인 제도로 만든다. 정치가문이 정부 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기반을 갖췄기에 유권자들의 표심이 정책이 아닌 가문의 이름값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신흥 세력 진입을 어렵게 만들며 그 결과 가문 권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 지난해 2월 실시된 태국 지방행정기구(PAO) 선출에서 태국 유권자들은 유력 정치가문에 강한 지지를 보였다. 지난해 8월 싱크탱크 필리핀개발연구소(PIDS)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도 마찬가지로 정치가문의 세도가 강한 지역일수록 견제와 균형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특정 가문들이 정치와 경제를 독점하는 등 권력이 사유화되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힘을 발휘하고 이는 부패로 이어진다. 지난해 태풍 ‘갈매기’와 ‘풍웡’으로 최소 259명이 숨지는 대형 수해가 발생한 필리핀에서는 홍수 방지에 쓰여야 했던 1185억 필리핀페소(약 3조 원)가 유력 정치가문 출신 정치인들의 지역구 사업에 투입된 사실이 밝혀지며 대규모 반부패 시위가 열린 바 있다.
또 정치가문 중심 정치구조하에서는 정치대립이 격화되며 건전한 정책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 관련 사건 심리에 착수하면서 2028년 대선을 앞두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을 앞세운 두 가문 간 정치적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친나왓 가문 지지 세력과 보수 및 야당의 충돌로 2026 회계연도 예산안 의회 처리가 지연되며 내수 침체와 관광 산업 타격이 가중된 바 있다.
김유정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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