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을 온 저는 도배(到配·죄인이 유배지에 도착함) 이후 그럭저럭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죄를 가중시키려는 논의는 이제부터 차차 진행될 것이니 또 어쩌겠습니까?/ 제 아들의 유배지와는 5∼6정(程) 거리입니다/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없어 바다에 걸터앉아 서로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纍人 到配之後 粗保殘喘/ 加論之發 自是次第事 亦復奈何/ 家兒配所 相距爲五六程/ 消息不能頻聞 只跨海相望而已)
1722년 2월 11일 김창집(金昌集·1648∼1722)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다. 그는 1721년 소론의 김일경·목호룡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위리안치(죄인을 울타리 친 집에 가두는 형벌)됐다가, 이듬해 1월 경상북도 성주에 이배됐다. 편지에 나오는 아들은 김제겸이다. 그 또한 부친과 함께 연루돼 유배됐다. 이 편지는 경북 성주 유배지에서 썼다. 편지에 언급된 ‘5∼6정(程) 거리’는 5∼6일의 일정(日程)을 말하는 듯하다. 1일정(日程)은 90리다. 당시 김제겸의 유배지는 함경북도 부령이었다. 이 편지를 쓰고 두 달 남짓 지나 김창집은 사약을 받았다. 뒤이어 김제겸은 참형으로 젊은 생을 마감했다.
김창집의 증조부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열세와 백성의 참상은 외면한 채 명분에 매몰돼 결사항전을 주장한 바로 그 척화파 김상헌이다.
김창집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이다. 서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으나 기사환국 때 사사됐다. 김수항은 죽기 전 아들들에게 ‘현요직(顯要職·높고 중요한 관직)’을 피해 몸을 보전하고 집안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김창집의 아우 김창협과 김창흡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벼슬을 멀리하고 대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김창집은 끝내 이 유언을 지키지 못해 자신은 물론 아들과 손자까지 참살되는 화를 입었다. 그 김창집의 증손자가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다. 김조순에 의해 조선 말 외척 세도정치의 암흑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조선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문헌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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