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이재명 정부의 국익 중심 실용외교가 유독 러시아에는 예외이다. 왜 그럴까? 최근의 담론은 대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러 관계의 경색 지속을 규정하는 듯한 전제를 깔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서구 제재가 해제되지 않는 한 한·러 관계 복원이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외부 제약론이 한·러 관계 결빙의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의 시각은 다르다. 우리의 종합 국력 상승과 국제적 위상 제고가 현 한·러 관계를 더 근원적으로 규정한다고 본다. 러·우 전쟁이 한반도에 시사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때 정부의 대러 정책에서 가능한 선택지들이 제시될 수 있다.

사물의 역학관계는 언제나 계기를 만나 현상으로 발현된다. 국제질서 대전환의 분수령인 러·우 전쟁이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핵심만 간추리면, 북한의 비핵화를 불가역적으로 만들었고, 미국·러시아 대리전을 남북한 대리전으로 전이시켰으며, 북·러를 군사동맹으로 재결속시켜 한반도 안보 경직성을 심화시켰다. 한·러 관계로 한정하면, 러·우 전쟁은 양국 간 힘의 역학관계에서 변화를 보였다. 러시아 쪽으로 현저히 기울어 있던 힘의 저울추가 평형 상태 또는 그에 근접한 수준으로 우리의 국력이 괄목상대하게 됐고, 이런 힘의 변화에 기초해 양국은 우크라이나 문제를 놓고 팽팽한 길항작용을 연출했다.

윤석열 정부는 대담하게도 러시아의 급소인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직접 지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독자 제재까지 단행했다. ‘최소한’을 넘어선 이런 조치는 한국의 총체적 국력 신장에 따른 고양된 자신감에서 비롯된 바 크다. 한·러 간 전통적인 갑을(甲乙) 관계 변화의 서곡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갑의 지위 유지를 위해 곧바로 북한 카드를 꺼냈다. 김정은 정권과 스킨십을 강화했고 군사동맹 재구축으로 반격했다. 여전히 대북 첨단무기 제공과 기술 이전 패를 흔들며 한국을 순치시키려 한다.

대러 관계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관계 개선이 더딘 것은 크렘린의 한국 길들이기에 청와대가 노심초사하지 않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의연함은 한국도 이제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했고, 러시아에 동원할 수 있는 유효한 지렛대가 적지 않다는 전략적 계산에 기초한다. 긴 호흡으로 보면 현재의 긴 한·러 관계 ‘휴지기’는 변화한 힘의 상관관계에 기반해 양국 관계를 원점에서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어찌 보면 더 큰 도약을 위한 일종의 성장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러 관계 리셋은 새로운 대러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 한국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크렘린의 북한 도구화 전략에 말려들지 않기, 경제와 안보를 교환하는 관성적인 정책 패턴에서 벗어나기, 서구는 항상 선이고 러시아는 무조건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극복하기, 북·러 관계를 한·러 관계와 ‘영합 게임’으로 보는 제로섬적 시각에서 탈피하기, 대러 외교에서 독자성 강화하기 등을 그 원칙과 방향으로 제시할 수 있다.

실용외교에서 화룡점정은 대러 관계 개선일 것이다. 관계 복원의 핵심은 러·우 전쟁 종료, 대러 제재 해제와 같은 외적 조건의 조성을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관계 개선의 여건을 선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실용외교는 무릇 파레토최적의 국익 주고받기, 즉 거래의 미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는 독자 대러 제재의 완화 또는 해제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고 한·러 양국의 관심을 빨아들이는 이슈, 특히 북극 개발 및 항로 개척에 관한 다층적 소통이 한·러 관계 복구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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