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권 산업부 차장
‘Korea Inc.’(주식회사 한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마다 일제히 투자 보따리를 푸는 한국 대기업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다. 해외 주요 언론들은 한국 대기업들이 국가적 목표나 외교적 행보에 발맞춰 한 몸처럼 긴밀하게 협력하는 현상을 조명할 때 이 단어를 쓴다.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 등도 한국의 이러한 독특한 민관 협력 모델을 두고, 때로는 민간 기업이 ‘준공기업’에 가까운 공공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평가한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의 불똥이 한국 경제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고유가와 공급망 교란이라는 거대한 외부의 파고 앞에서, 우리 기업들은 이번에도 묵묵히 정부의 SOS에 응답하며 위기의 ‘방파제’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선제적인 가격 인상 자제, 비상 생산 체제 가동, 에너지 절감 대책 동참 등 고통 분담에 적극적이다. 앞서 청년 실업난, 고환율 위기 등 굵직한 난제가 있을 때마다 기업들은 정부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문제는 헌신적인 위기 대응 이후에 돌아오는 아쉬운 청구서다. 국가적 위기 때마다 기업은 자본의 논리보다 ‘공공의 방파제’ 역할을 우선시하며 막대한 재무적 부담을 감내하지만, 정작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겹겹이 쌓인 규제의 굴레인 경우가 많다. 헌법의 기본 원칙인 자유시장경제 아래서 기업이 원가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해 주주 가치를 방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의 희생이 너무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업의 헌신은 종종 현행 규제 환경과 모순을 일으킨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정 시행 중인,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한 상법이 대표적이다. 경영진이 정부의 민생 시책에 호응해 이윤을 양보하고 가격을 동결하며 국가에 기여하려 해도, 이는 자칫 행동주의 펀드 등으로부터 ‘주주 가치 훼손’을 이유로 한 배임 소송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딜레마를 낳는다. 국가를 위한 방파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오히려 사법 리스크에 노출되는 셈이다. 여기에 최근 정부의 대한상공회의소 감사 등 경제단체를 향한 압박은 재계의 위축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물론 기업이 국가적 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것은 분명 한국 경제의 강력하고 고유한 자산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글로벌 패권 경쟁이나, 작금의 중동발 에너지 위기 등은 ‘팀 코리아’ 체제가 아니면 돌파하기 어렵다. 청년 일자리, 저출산 대응 역시 민관이 한 팀이 될 때 낼 수 있는 시너지가 크다.
다만, 든든한 방파제가 앞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려면 그 기반을 튼튼히 다져주는 정부의 화답이 필요하다. 위기 때마다 정책의 동반자로 기업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정작 기업 활동은 각종 규제로 옥죄는 엇박자는 이제 해소돼야 한다. 정부는 기업이 국가적 대의에 안심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불합리한 낡은 규제들을 선제적으로 풀고, 소송 위협 등으로부터 경영진의 합리적 결정을 보호할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위기의 파도를 맨몸으로 막아내는 기업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의 ‘족쇄’가 아니라,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넓혀진 ‘운동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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