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시간이 멈춘 듯한 경북 청도

 

지도엔 없지만 간판은 다 ‘유천’

상권붕괴후 멈춘 기계처럼 박제

90년 정미소·70년 양조장 ‘뭉클’

 

유치환·이영도 금단의 사랑 유명

‘사랑하는 것은 받느니보다 행복’

동네 벽화에 러브레터 담은 詩

 

신도리 새마을운동 발상지 공원

박정희, 주민 수해 복구장면 목격

농촌 자조노력 관련 연구 시작돼

 

지금도 5일 마다 열리는 풍각장

푸짐한 소머리 국밥 노포 ‘명물’

낡은 분위기·넉넉한 인심 반겨

1967년 개관해 1990년대에 문을 닫은 청도의 유천극장. 유천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옛 모습을 복원했다. 간판 속 영화는 1968년작 김지미·남진 주연의 ‘별아 내가슴에’.
1967년 개관해 1990년대에 문을 닫은 청도의 유천극장. 유천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옛 모습을 복원했다. 간판 속 영화는 1968년작 김지미·남진 주연의 ‘별아 내가슴에’.

청도=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지도에 없는 지명… 느릅내

경북 청도의 남쪽에 ‘유천(楡川)’이 있다. 유천은 지명(地名)이지만, 지도에는 안 나온다. 공식 행정 지명은 청도읍 ‘내호리’와 ‘유호리’다. 그런데도 일대의 가게들은 죄다 ‘유천’이란 상호를 이마에 달고 있다. 유천극장, 유천주막, 유천우체국, 유천정미소, 유천농업사, 유천식육식당, 유천국수집…. 지도에는 없는 지명이, 어찌 된 일인지 가게 간판과 입말로 성하게 살아남아 있다.

유천은 조선 시대 동창천과 청도천이 T자로 만나는 곳에 있었다는 ‘유천역(楡川驛)’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유천역은 1905년 놓인 경부선 철도의 기차역이자 근대 영남대로의 길목이기도 하지만, 열차가 놓이기 전에도 여기는 유천역이었다. 조선 시대 숙박과 공문전달 등을 담당하던 교통 통신기관인 역원(驛院)의 그 ‘역’ 말이다. 느릅나무가 우거진 천변에 있다고 해서 ‘느릅나무 유(楡)’ 자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역 이름을 지었다. 유천. 우리 말로 하면 ‘느릅내’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죽바위. 윗부분이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형이 독특하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죽바위. 윗부분이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형이 독특하다.

조선 시대 유천역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 기차역 유천역도 2000년 경부선 철로 이설로 2.5㎞ 떨어진 밀양 쪽으로 옮겨져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유천은 ‘아무 데도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명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유천에 가서 보면 대번에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변하지 않아서’다. ‘유천’이란 예전 지명의 상호를 걸고 있는 가게들이 늘어선 내호리와 유호리 골목에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붙으려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낡은 간판만 남기고 문 닫은 유천의 가게들은 ‘어느 날, 산소호흡기를 떼고 고요하게 맞이한 죽음’ 같은 모습이었다.

상권이 무너지고, 시장이 빠져나가고, 기차역이 떠나면서 이미 승부는 갈린 셈. 허물고 다시 지을 엄두도, 살아남으려는 의지도, 문 닫고 업종을 전환할 마음도 내지 못했던 가게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작동이 중단된 기계처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형태로만 남겨진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 예전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과 가게를 둘러보다 떠올린 건 ‘포르말린을 넣어 보존처리한 곤충채집 표본’이었다. ‘진공의 공간 속에서 정물처럼 멈춰버린 벽걸이 시계’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찮다거나 초라한 신세라는 뜻이 아니다. 곤충표본이 ‘진짜 곤충’으로 만든 것이듯, 이곳의 오래전 풍경도 ‘진짜’를 방부 처리해 보존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천이 보여주는 ‘레트로’가 살아있거나 작동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본 뼈대와 틀만큼은 진짜라는 얘기다.

풍각장날 옷가게에 걸어놓은 옷.
풍각장날 옷가게에 걸어놓은 옷.

# 정미소와 양조장, 그리고 한약방

유천은 40∼50년 전쯤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곳이다. 한때 장터였던 반듯한 마을 중심 골목 양쪽으로 줄 맞춰 늘어선 가게에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함석지붕에 흙벽을 두른 영신정미소, 돌로 지은 독특한 건물에 들어선 구생당한약방, 사료판매소 간판을 걸고 있는 박공지붕의 옛 양조장, 독학으로 공부해 익힌 기술로 흑백TV를 고쳐줬다는 중앙소리사. 단조·밀링·판금·베어링 등을 진열장에 적어놓은 자그마한 철공소…. 놀랐던 건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는 영신정미소가 아직 나락과 등겨 먼지를 날리며 도정기계를 돌리고 있는 현역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천의 오래된 가게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어디를 열고 들어가든지 누군가가 일생을 바친 노고가 느껴지는 듯해서 때로 뭉클한 감동이 느껴진다. 가게마다 잠겨있는 시간의 지층이 다 다르다. 영신정미소에는 90년 시간이 깃들어 있고, 옛 유천소주 양조장은 70년쯤, 중앙소리사는 50년쯤의 시간이 있다. 2000년에 대구서 이곳으로 옮겨와 개업했다는 ‘새천년이용소’가 유천에서는 가장 젊은 막내뻘인데, 그래도 자리를 지켜온 세월이 사반세기가 넘었다. 이발사 최흥식(71)이 이용소를 내면서 함께 샀다는 ‘100년은 족히 됐을 것’이라던 살림집 안방을 보여줬다. 벽지 대신 신문지로 도배한 방이다.

세월을 훈장처럼, 혹은 흉터처럼 달고 있는 가게들 사이에는 지금은 없어진 것들과 그 시절 삶의 풍경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이불을 나눠 덮고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브라운관TV를 보는 대가족의 모습도 있고, 장날 뻥튀기 장수의 ‘뻥이요’ 하는 순간도 그려져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며 활짝 웃는 아이들과 쌀가마니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아주머니의 노동을 그린 그림도 담벼락에 생생하다.

오일장이 섰던 골목을 따라서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양과점, 양장점, 정육점, 대폿집, 사진관 그림도 그려졌다. 유천에 남아있는 ‘진짜 레트로’를 문화공간으로 다듬은 ‘유천문화마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새마을테마파크에 재현해놓은 1970년대 대폿집 모습.
새마을테마파크에 재현해놓은 1970년대 대폿집 모습.

# 늙은 극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은 이유

유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유천극장이다. 1967년 문을 연 극장은 청도읍의 청도극장이나 중앙극장과 경쟁했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한창때는 멀리 청도 매전면 동곡에서도, 밀양에서도 ‘극장구경’을 하러 밀려들었다. 극장 위치가 장터 한쪽 끝이어서 장날이면 관객들로 극장이 터져나갈 정도였단다. 극장에서는 영화를 주로 상영했지만 유랑극단 쇼도 보여줬고, 간혹 약장수가 극장을 빌려 공연을 하며 약을 파는 일도 있었다.

유천극장은 TV 보급으로 관객이 서서히 줄면서 1990년대에 문을 닫았다. 문 닫은 극장은 방치되다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극장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불을 내는 바람에 지붕과 내부 일부가 타버렸던 것. 오래전에 문을 닫은 데다 불까지 났지만 유천극장은 반세기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극장이 원형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문 닫은 극장 건물이나 부지의 ‘쓸모’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극장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문 닫은 극장이 온전하다는 건 그만큼 쇠퇴한 곳이라는 걸 말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었다.

근대건축물과 오래된 골목 풍경을 보여주는 유천문화마을의 중심은 단연 극장이다. 문화마을을 조성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영화관 간판을 거는 것이었다니까. 간판에는 김지미, 남진 주연의 1968년 영화 ‘별아 내 가슴에’의 장면과 신성일, 박노식 주연의 1969년 영화 ‘상해 임시정부’의 장면을 그렸다. 간판을 걸어놓은 옛 극장 모습을 어찌나 감쪽같이 재현해 놓았던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사기로 상영하는, 자주 필름이 끊기는 오래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천문화마을의 벽화. 주택가 담에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영도 시인의 얼굴을 그렸다.
유천문화마을의 벽화. 주택가 담에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영도 시인의 얼굴을 그렸다.

# 시인의 사랑과 레트로 정서

유천에는 또 오누이 시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이 태어나 자란 생가가 있다. 시인은 모른다 해도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교과서에 실렸던 이호우 시인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을 모를 수는 없겠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여동생 이영도는 작품보다는 청마 유치환이 짝사랑해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던 마음속의 연인으로 유명하다. 유부남이었던 유치환과, 남편과 사별한 이영도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고, 하물며 둘은 교사였다. 유치환이 마음속의 연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편지밖에 없었다. 편지를 부치는 장면이 등장하는 유치환의 시가 있다. 시에 등장하는 편지의 수신인은 당연히 이영도였을 터.

“…/ 사랑하는 것은 /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시 ‘행복’ 부분)

오누이 시인의 생가 근처 기와집 벽에 이 시와 함께 두 사람의 얼굴과 우체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유천에서 경험하는 이른바 ‘레트로 감성’은 문 닫은 극장이나 누추한 골목, 문 닫은 가게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우체국에서 부친 연애편지, 마음속에 꾹꾹 담아야 했던 연정이야말로 디지털 세상에서 레트로 감성을 일깨우는 정서적 풍경이다. 안타깝고 절절한 사랑의 서사는, 이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 사랑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추억하게 한다.

유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주민의 진심 어린 선의(善意)와 호의적인 태도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찍고 있는데, 주민 네댓 명이 다가와 안내를 자청하더니 앞장서서 ‘이곳도 찍으라, 저곳도 찍으라’며 훈수를 뒀다. 텅 비다시피 했던 마을에 관광객이 찾아오는 게 반갑고 한편으론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가게의 내력과 거기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민들이 자신들의 추억이 묻은 오래된 가게며 공간을 짐짓 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의 새마을테마파크 전시관.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의 새마을테마파크 전시관.

# 새마을운동 시절의 유물

유천에서 5㎞쯤 떨어진 청도읍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이 있다. 새마을운동을 대하는 태도나 평가는 정권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칭송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새마을운동 자체가 아니라 통치자 쪽에게 조명을 맞추고 있어서다.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던 가난을 극복하고자 협동과 울력으로 펼쳤던 잘살기 운동의 노력과 성취를 그것 그대로 평가하기보다는, ‘통치자의 결단’을 앞세워 칭송하거나 반대로 ‘정치적 동원수단’이었다며 폄훼한다는 얘기다.

청도가 신도리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자처하는 건 1969년 8월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시찰 때 벌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전용열차 편으로 경남을 향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신도1리 앞을 지나다가 주민들이 제방복구와 지붕과 담장을 개량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기차를 세웠다.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으로 협동해 좋은 마을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대통령은, 이듬해인 1970년 4월 열린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신도 1리를 예로 들어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에는 두 가지 시설이 있다.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변천을 기록과 사진 등을 이용해 전시한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 모습을 세트장과 소품 등으로 재현해 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유천마을의 레트로 공간과 짝을 이루는 곳은 마을 뒤 언덕을 끼고 초가집, 슬레이트집, 기와집, 구판장, 왕대폿집, 식당 등을 촬영세트장처럼 지어놓은 새마을테마파크다. 세트장은 허름하고 띄엄띄엄 들어선 관람공간이 비탈에 있어 불편한 데다 동선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쯤을 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학교 교실이며 그 시절의 대폿집·구판장 등을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이다. 특히 성냥통과 책가방, 소주병, 영화포스터 등 오래된 소품들이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청도 풍각장 노점에서 풀빵을 굽는 모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너 곳이 있었다는데 풍각장의 풀빵집은 딱 한 곳만 남았다.
청도 풍각장 노점에서 풀빵을 굽는 모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너 곳이 있었다는데 풍각장의 풀빵집은 딱 한 곳만 남았다.

# 추억으로 멈춰 서다… 풍각장 국밥집

청도에는 과거의 경관이 남아있거나 어제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곳들이 참 많다. 애써 찾아가야 할 만큼 이름난 명소는 아니지만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장소가 많다는 얘기다.

청도에는 풍각면이 있다. 청도 서부지역의 교통과 물산이 모이던 곳이다. 이웃한 각북면은 ‘풍각의 북쪽’이라 붙여진 지명. 각남면은 ‘풍각의 남쪽’이란 뜻의 지명이다. 인접한 면 단위 지명의 방위를 정하는 ‘기준점’이 됐을 정도니까, 풍각면의 과거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풍각의 중심은 5일마다 서는 풍각장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위세가 눈에 띄게 줄어든 데다, 오전에만 반짝 붐비다 손님이 빠져나가 금세 헐거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2·7일 장날이면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장 구경을 할 만큼은 된다.

풍각장 부근의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을 토렴하는 모습.
풍각장 부근의 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을 토렴하는 모습.

풍각장의 명물은 소머리국밥을 푸짐하게 내는 노포(老鋪)다. ‘어디’라고 딱 짚기 어려운 건 상호가 불확실해서다. 가게 현수막과 유리창에는 ‘맛있는 소머리국밥’이라고 붙였는데, 가게 이름인지 아니면 그냥 ‘소머리국밥이 맛있다’는 진술인지가 불분명하다.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식당 상호는 ‘풍각소머리국밥’. “이게 가게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그렇다’도 아니고 ‘아니다’도 아니다. ‘그냥 풍각장의 소머리국밥집’이란다.

이 식당에서 국밥을 말아내기 시작한 지는 70년이 넘는다. 이 정도 내력이면 자랑도 할법한데 도무지 그런 게 없다. 특별한 고집이나 전통 같은 것도 없다. 우선 식당부터가 샌드위치 패널의 간이건물이다. 국밥을 담아내는 뚝배기도 묵직한 오지그릇이 아니라 싸구려 멜라민 재질이다. 메뉴는 딱 두 개. 국밥 아니면 수육. 주문도 받기 전에 뚝배기 아래 밥을 깔고 그 위에 고기를 가득 담아 열 번 가까이 토렴해서 국밥을 낸다.

국밥집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간이건물의 허름한 분위기도, 인심 좋게 넣어주는 고기도, 여러 번 토렴해 밥알에 스민 국밥 맛도 여전하다. 국밥 가격은 7000원. 가격은 올랐지만 고깃국치고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국밥집뿐 아니라 풍각면에 이제 세 곳만 남았다는 중국집도, 칼칼한 맛의 추어탕 집도 시간의 깊이만 조금 다를 뿐,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매전면 덕산리의 폐업한 방직공장 자리에 문을 연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에 전시한 포니 자동차.
매전면 덕산리의 폐업한 방직공장 자리에 문을 연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에 전시한 포니 자동차.

# 포니승용차와 고향에 심은 벚나무

매전면 덕산리에는 1990년대 방직공장을 개조해 만든 빈티지 카페 ‘덕산방직’이 있다. 향토역사문화 단체인 대구경북근현대사연구소 강철민 소장이 문 닫은 방직공장을 인수해 그동안 수집한 근현대의 다양한 물품을 전시하는 ‘기억의 공간’ 프로젝트로 시작한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공장은 리모델링을 거쳐 절반은 카페 공간으로, 나머지 절반은 레트로 오락실, 만화방, 문방구, 비디오가게 등을 재현한 체험공간으로 나눠 조성했다. 체험공간에는 카세트테이프와 통성냥, 분유통, 공중전화기 등 소품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다. 브라운관TV와 짐자전거, 포니 승용차, 포니 픽업트럭 등도 체험공간에 들여놓았다. 오래전의 추억에 젖어 과거를 되새김할 수 있는 곳이라 레트로 테마의 청도 여행 코스에 이어붙이기 딱 좋은 곳이다.

마침 벚꽃이 한창이라서 청도의 꽃구경 얘기를 덧붙인다. 풍각장에서 멀지 않은 각북면에 터널을 이룬 벚꽃길이 있다. 각북면 우회도로(각북면 우산∼이서면 가금) 2.4㎞ 구간이 ‘각북벚꽃길’이다. 지난주에는 벚꽃길에 꽃이 없었는데 며칠 만에 연분홍 벚꽃이 활짝 피어 만개했다.

각북벚꽃길에는 사연이 있다. 그 얘기가 각북면에서 벚꽃길 입구에 세운 ‘각북벚꽃길 유래비’에 새겨져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각북면 명대리 출신의 이창상(73) 유신산업 창업주. 그는 열일곱 나이에 어머니가 쥐여준 삶은 달걀 5개를 들고 상경해 공장 일을 하면서 모진 고생 끝에 가구회사를 창업해 지금의 규모로 키웠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른 1999년 이 씨는 ‘성공해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했다.

어머니의 유훈을 지키고자 그는 명대리 마을 앞 청도천 둑에 3년생 벚나무 묘목 630그루를 사비로 사서 심기 시작했다. 이 씨가 벚나무를 심자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도 합세하면서 지금처럼 울창한 벚나무 터널이 만들어졌다.

청도에는 이른바 ‘무작정 상경’ 시대에 타지에서 성공한 이들의 고향 사랑 흔적이 유난히 많다. 마을회관마다 지역 출신 출향 인사의 경제적 지원을 기리는 송덕비 하나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고된 노동을, 고향을 지켜온 이들은 지독한 가난을 견뎌야 했던 시절 얘기다. 너나없이 모두 다 어려웠던 시절을 위로하듯 각북벚꽃길의 벚꽃은 올해도 화사하게 피어났다.

■ 죽바위

청도에 있지만 청도 사람도 잘 모르는 곳이 있다. 각남면 녹명리 구만마을의 ‘죽바위’다. 테이블 형상의 거대한 바위는 평평하지만, 바위 끝은 수직 직벽의 벼랑이라 오금이 저린다. 이곳을 왜 ‘죽바위’라 불렀을까. 첫 번째 전설은 이곳에 있었던 고대국가가 신라로부터 침공을 당하자 바위에 숨어 죽(粥)을 먹으며 견뎠다는 이야기. 두 번째는 바위 형상이 죽그릇을 빼닮아 불렀다는 설. 세 번째는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바위에 기운이 스민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며 ‘죽(粥)바위’란 지명 대신 ‘죽(竹)바위’로 개명했다는 얘기다.

박경일 전임기자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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