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미래의 희망은 청년들에게 있다. 100년 전 이맘때에도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다.
첫 번째는 1926년 4월 5일 매일신보에 소개된 비참한 농민의 생활을 구제하고자 입승기(叺繩機) 즉 가마니 짜는 기계를 발명한 한 청년의 이야기다. “성공은 노력의 사물(賜物·선물)이다. 그리고 노력은 도처에서 기대되고 있다. 옥의옥식(玉衣玉食·호의호식)하는 무직(無職)의 귀족은 삼순구식(三旬九食·집안이 몹시 가난함)하는 노력의 범부(凡夫)에 비하여 인간적 가치에 있어서 한층 떨어지기 요원(遙遠·아득하게 멀다)하다. 아등(我等·우리들)은 이에 표본적 인물을 발견하였으니 그는 곧 춘천 남면 퇴계리의 박창훈 씨다. 박 씨는 가운(家運)의 조락(凋落)을 면하고자 승입(繩叺) 제조기를 제작함이 아니오, 처음부터 이상(理想)은 비참한 농민 생활의 구제에 있었다.
박 씨가 경성 휘문의숙을 거쳐 현 고등공업의 전신을 2학년까지 다니다가 가사(家事)가 이상을 돌이키게 하여 표연히 조치원에 가서 입기(叺機) 제조와 입직(叺織) 전습을 수득(修得)한 후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박 씨는 스스로 개선해 만든 기계를 보급하며 변화를 만들어 낸다. “자기의 독특한 창견(創見)을 가미하여 입기를 제조하며 한편으로 이를 전 면(面) 또는 각 군(郡) 지방에 선전하여 부업을 권려(勸勵)하니 사람들은 그 열성에 감동되어 신입(申叺·신청)이 쇄도하므로, 박 씨는 기계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월부로써 판매했다. 이 기계는 심히 완전하므로 각지로부터 주문이 많고 퇴계리 부근은 전부 보급되었고, 따라서 동민의 생활이 유족(裕足)하게 되었다. 개중 어떤 농민은 과대한 부채에 가세가 비운에 빠졌는데, 박 씨의 권려로 입기를 얻어 열심한 결과 현재는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다. 박 씨는 청년을 보내고 장년기에 들어선 독지가로 다수한 사람을 실제적으로 구하여 지방의 유력가로 명성이 높다. 박 씨의 고향인 신남면은 박 씨를 중심으로 입(叺·가마니) 생산 조합을 창립하였는데 생산자 수 200호에 대한 1년 생산 가마니 수가 14만4000매에 달하고 이를 환산하면 실로 2만8000여 원에 달한다더라.”
다음은 1926년 4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도보로 무전여행 도전에 나선 두 청년의 이야기다. “츠래벨러(traveler)의 시슨(season)이 돌아옴에 이곳저곳에서 혹은 도보로 혹은 자동차로 여행이 성행하나 아직 조선인 청년으로서 일본까지 무전여행을 단행한 이렇다 할 용사가 없었다. 얼마 전에 인도 청년의 자전거 세계 일주가 조선을 통과한 뒤를 이어 평양 소년 10여 명이 도보로 평양-부산 간 여행을 하려다가 학부형의 염려로 부득이 중지를 당한 일이 있었다. 경성법전, 고등상업의 두 김 군이 경성-신의주 간 도보 답파를 지난 2일에 마쳤고, 같은 날에 일본 동경에서는 한 청년이 중국 장춘(長春)까지 도보 여행의 길을 떠났다. 이때에 있어 또 경성의 ‘스폿스맨’ 2명 즉 김봉이(22)군과 박점수(26)군이 경성-동경 간 수륙만리(水陸萬里)를 무전(無錢)으로 답파(踏破)하기 위해 8일 조조(早朝) 출발하였다.”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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