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범 산업부 부장

“5월 이후 주사기 원재료 공급이 끊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유리 주사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와요.”

주사기 제조업체 영업담당자의 얘기다. 1840년대 중반 등장한 유리 주사기는 재사용으로 인한 교차 감염 우려가 이어지다가 1960년대 플라스틱 기술의 발전으로 일회용 주사기가 생산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미국·이란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그 전쟁의 여파로 수만 리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한국이 최소 반세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걱정이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8일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을 선언했지만, 전쟁 때문에 발생한 각종 원자재 등 공급망 불안은 수개월 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번 미국·이란 전쟁이 한국에 미친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은 원유 수입분 가운데 중동산 원유 비중이 70%가량이나 되고, 이 가운데 대부분이 전쟁 영향으로 봉쇄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수입된다. 석유 및 석유 파생제품을 쓰는 산업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여서 국내 전(全) 산업이 영향권에 속해 있다. 플라스틱컵, 쓰레기봉투 등 생활용품들은 물론, 레미콘 혼화제,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 절삭유, 접착제 등 산업 생산 현장 곳곳의 숨은 필수재들이 전쟁 직격탄 대상 품목들이다.

심지어 2일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비전투 국가 중 한국을 이번 전쟁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국가로 꼽았다. CSIS는 “한국이 여러 핵심 자원의 호르무즈 의존도가 높아 향후 2∼6개월 동안 운송, 물류, 석유화학, 농업, 식음료 등에서 물가 상승의 파급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산업계, 특히 중소기업계는 전쟁 영향을 고스란히 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중소벤처기업부는 1조9374억 원의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지원에 나서겠다고 한다. 추경안에는 수출기업 지원을 위해 수출바우처 예산 1000억 원 등 4622억 원, 특별경영안정자금 3200억 원을 비롯한 소상공인 등 경영·안정을 위한 5852억 원, 스타트업 지원이나 창업 열기 확산을 위한 8031억 원 등이 포함돼 있다.

돈을 풀어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정책적인 뒷받침 없이는 기업 생태계를 살리지 못한 채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된다. 당장 올해 3월 10일 시행된 노란봉투법으로 대기업과 노조 사이에 ‘끼인’ 중소기업들은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하반기부터는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와 여당은 5월 1일(노동절)을 계기로 ‘근로자 추정제’ 도입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전쟁 파도를 넘고 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규제 태풍이 몰아치는 것이다.

전쟁은 천재지변과 함께 불가항력에 속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어도, 적어도 반세기 후퇴를 걱정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규제 도입의 속도 조절은 불가피하지 않을까. 중소기업들의 생존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장석범 산업부 부장
장석범 산업부 부장
장석범 기자
장석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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