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韓 고용 경직성 中보다 심각해

AI 혁명 노동 뿌리째 흔들 것

대립 투쟁과 극심한 혼란 우려

 

노조 설득한 블레어 개혁 완수

李도 사회적 대타협 화두 제시

선택지 아닌 공동체 생존조건

토니 블레어 진보 정권(노동당)이 집권했던 기간 영국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신장했다. 1997년부터 10년 사이에 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6000달러(약 3830만 원)에서 약 5만 달러로 2배 가까이로 늘었다. 배경에는 노동·재정·복지를 아우르는 구조 개혁을 이끈 블레어 리더십이 있었다. ‘제3의 길’ 노선을 내건 블레어 총리는 이전의 보수 정권이 확립한 노동 유연성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조를 설득하고 사회적 대타협의 길을 개척했다. 국익을 위해 진영 논리를 넘어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도 주가 부양, 부동산 투기 근절에 이어 고용 유연성을 새로운 화두로 제시했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되 고용 유연성을 높이는 대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대통령이 덴마크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덴마크는 해고가 비교적 자유로운 ‘유연성’과 강력한 실업급여 및 재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유연 안정성’의 대표국으로 꼽힌다. 1993년만 해도 10.7%에 달했던 실업률은 현재 4∼5%대로 떨어졌고, 취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상위권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현주소는 어떤가. 고용 유연성을 상징하는 노동시장 규제 자유도 지수는 놀랍게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떨어진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캐나다 프레이저연구소의 노동시장 규제 자유도 지수(2023년)를 보면 한국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해당 지수는 노동 관련 법·제도와 최저임금·채용·해고·근로시간·외국인 고용 규제, 해고 비용 등을 종합 평가한 지표다. 한국은 조사 대상 165개국 중 152위로, 멕시코(120위), 캄보디아(143위) 등 주요 개발도상국은 물론이고 중국(149위)보다 뒤처진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회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2026 국내 경영환경 설문’ 결과를 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 입지 선호도에서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에 편입된 홍콩에 2위 자리를 내줬다.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시행을 비롯한 정부의 노동 규제 강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용 경직성은 공짜가 아니다. 대가가 따른다. 기업들은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업무에 태만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도는 직원조차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신규 채용을 꺼리는 ‘일자리 불임 경제’를 초래한다.

삼성반도체·SK하이닉스 노조는 ‘로또’로 불릴 정도의 성과급을 전 직원에게 나눠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고용 경직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삼성 반도체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상한 없이 성과급으로 평등하게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SK하이닉스 노사는 지난해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는데 합의한 바 있다. 증권가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이들 회사의 올해와 내년 영업이익 전망치를 고려하면 이들 노조는 앞으로 2년간 총 142조 원의 성과급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SK하이닉스 직원들은 1인당 평균 13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내년 초에 받을 것이라는 억측이 돌고 있는 이유다. 반도체 생산 라인을 5개 가까이 짓고, 1만5000여 명의 신규 인력을 채용할 수 있는 금액이다.

세계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의 주역인 미국 엔비디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S급 인재에겐 수억 원 이상의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을 지급한다. 현금 성과급은 성과를 따져 기본 보상의 최대 200%를 지급한다. 기업 가치를 높여 주가를 올리는 데 올인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AI와 로보틱스 혁명이 촉발한 문명사적 대전환은 앞으로 고용 경직성을 뿌리부터 흔들며 노동·산업 현장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다. 고용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 대타협의 길을 서둘러 준비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경제·사회는 앞으로 극한 대립과 투쟁으로 얼룩지며 극심한 혼란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장을 위한)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면 기업도 사회안전망 강화에 적극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대타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우리 공동체의 생존 조건이다. 노사정 모두 행동으로 옮길 때다.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기자
이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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