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85cm에 달하는 종이에 배치된 글과 일러스트…
붉은 색의 정사각형 케이스와 위에 새겨진 스크래치 은박…
그리고 이를 긁어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익명의 저자…
길고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던 ‘철학서’가 파격적인 형식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가가려하고 있다. 글항아리에서 최근 펴낸 ‘페이지원-가면을 쓴 철학자’의 얘기다.
‘한 쪽짜리 책’을 내세운 페이지원은 한 편의 글을 한 장의 종이에 담아내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로 85cm, 가로 45cm의 크기로, 출판사에 따르면 “인쇄소에 한 번에 가장 길게 인쇄할 수 있는 길이를 수소문해 정한 형태”다. 세번으로 접힌 종이를 차례로 펴면 보이는 것은 검정 색과 붉은 색의 글씨, 그리고 사이를 채운 일러스트와 사진이다.
글은 프랑스 철학자 간의 대담을 담고 있는데, 한 철학자의 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철학자 F라고 명명된 인물에 대한 다른 정보나 이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 역시 없다. 이는 F가 1980년 1월 ‘르몽드’지에 실을 글을 위해 또다른 철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와의 대담에 응하면서 ‘익명’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
“관념보다 스타성이 중요해졌으며, 사유는 그 자체로 더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말해지는 바가 말하는 이의 개인적 특성보다 덜 중요해졌기 때문”에 F는 의도적으로 철학자의 존재를 지우려했다. 이에 따라 독자는 F가 누구일지에 대한 의식 없이, 그 자체로 글에 주목하게 된다. 대담은 당대의 지식인 담론, 이를 받아들이는 독자와 미디어에 대해 다룬다. 정치철학자 배세진이 이를 우리말로 옮겼다.
독자들은 나중에서야 별도로 마련된 책 케이스 위의 스크래치 은박, 그리고 동봉된 가짜 주화에 주목하게 된다. 은박을 긁으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흑백으로 된 F의 사진. 독자들은 사진으로 그의 정체를 유추해야 한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철학서에 덧씌워진 기존 이미지를 벗겨내는데 유효해 보인다. 텍스트힙을 통해 유입된 젊은 독자들의 눈길도 끌 수 있는 지점이다.
출판사 관계자는 톡특한 형식의 철학서를 출판한 것에 대해 “일반적인 책의 형태로 출간하긴 어렵지만 좋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있는 글을 보다 다양하게 그리고 빠르게 펴내고자 했다”며 “독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읽기를 위한 자리를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 호는 철학서로 시작했지만 문학 등 다양한 글을 담을 예정이라며 계절별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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