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속 계급 사회

일라이자 필비 지음┃ 방진이 옮김┃돌베개

 

경제 성장 수혜 본 베이비부머

자녀 결혼·주거·직업까지 관여

결국엔 ‘계층 사다리’ 무너뜨려

 

청년들의 ‘능력주의’ 환상 깨져

미래에도 ‘상속주의’ 심화 전망

사회정책 관점에서 논의할 필요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시중은행보다 든든한 자금줄이 있다. 이른바 ‘엄빠 은행’(bank of mum and dad)이다. 지난해 서울에서는 주택 구매에 투입되는 자금 중 부모 등으로부터 증여·상속을 받은 액수가 두 배로 급증하기도 했다. 부모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어디 돈뿐이겠는가. 부동산이나 현금 같은 지원부터 심리적 안전망 등 무형의 지원까지, 부모의 존재감은 중세나 근대보다 오히려 21세기에 더욱 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내리사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 세대가 경제 상승기에 자산을 증식한 후,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사다리를 치워버렸고, 그 결과 자녀는 부모의 자산과 그 상속에 더 깊이 의존하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 이 때문에 21세기 평범한 청년들의 교육, 주거, 결혼, 출산과 양육, 커리어 형성 같은 인생의 주요 이정표가 부모의 지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는 한국뿐 아닌 영국, 미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영국 역사학자 겸 작가인 일라이자 필비는 최근 펴낸 책에서 이러한 상황을 ‘상속주의’(inheritocracy) 사회라고 명명했다. 부모의 상속을 통해 자녀의 계급이 일찌감치 결정되는 사회다.

저자는 “상속은 늘 행해졌지만, 현재 청년 세대처럼 상속에 깊이 의존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 생긴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 배경에는 세대 간에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붐(1946∼1965년생) 세대는 급격한 경제 성장, 부동산 가격 상승, 연금제도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누리며 자산을 축적해왔다. 특히 다른 세대보다 주거 분야의 혜택을 많이 입었다. 영국에서는 이들 세대가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정부의 정책에 따라 공공임대 자택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현재 부동산 자산의 바탕이 됐다. 한국에서도 자본주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 베이비붐 세대가 부동산 시장의 큰손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 든 후로는 이들의 엄청난 수, 즉 투표권으로 인해 그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형이 만들어지는 일도 목격됐다. 보수 정부하에서 임금보다 부, 청년보다 노인이 우선순위가 된 정책들이 펼쳐진 것이다.

반면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와 Z세대(1997∼2010년생)인 청년 세대는 부모와 전혀 다른 경로를 걸어야 했다. 부동산 공급이 줄어들면서 주택 구입비가 치솟았고 교육비, 양육비 등 치러야 할 비용은 비싸진 반면 임금은 제자리였다. 게다가 시장이 불능 상태에 빠지고 정부가 축소되는 시기가 닥치자 이들은 가족, 특히 부모가 나눠주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들에서 학력, 계급, 부가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는 동질혼이 늘어나는 것도 상속주의 사회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저자는 영국의 부동산 관리업체 보고서를 인용해 향후 20년간 영국에선 5조5000억 파운드(약 1경1000조 원) 규모의 자산 이전이 예측된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시장 조사업체는 2045년까지 최대 84조 달러(약 12경4500조 원)의 자산이 세대를 건너 이전될 것으로 예상했다. 인류사 유례없는 부의 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부모로부터의 상속은 이들의 사후에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베이비붐 세대 부모가 죽은 후에야 실현될 유산 상속의 영향력까지 감안하면, 상속주의 사회는 점차 더 심화될 수 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환상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성인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부모의 자산에 의해 계층화되기 시작하더니, 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영국 재정연구원은 2023년 “사회 이동이 지난 50년을 통틀어 가장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내놨다. 저자는 이제 상속주의를 개별 가정의 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논의 테이블에 꺼내놓을 때가 됐다고 말한다. 기회와 공정, 돌봄과 복지를 둘러싼 사회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불리한 역학관계에 놓인 청년들을 위한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2024년 영국에서 먼저 출간된 책의 영어 원제가 “상속주의-엄빠 은행에 대해 말해야 할 시간이 됐다(Inheritocracy-It’s time to talk about the bank of mum and dad)”인 이유다. 362쪽, 2만3000원.

인지현 기자
인지현

기사 추천

  • 추천해요 1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1
  • 슬퍼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