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부모님 세대에 구청(區廳)은 본디 익숙한 공간이었다. 증명서 한 통 떼러 가서 창구 직원과 안부를 나누고, 로비 의자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던 동네의 거점이었다. 그 익숙했던 공간이 어느 날부터인가 낯선 ‘기계의 성(城)’으로 변해 버렸다. 화려한 전광판과 무인 키오스크가 점령한 구청 로비에서, 부모님은 갈 길을 잃고 멈춰 서 계신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가속화한 디지털 행정이 정작 ‘사람’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디지털 전환의 성과를 홍보한다. 하지만 통계 이면의 그림자는 짙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최신 조사(2025년)에 따르면,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의 71.8% 수준이다. 스마트폰 보급으로 기기 접근은 쉬워졌을지 몰라도, 이를 행정 서비스에 활용하는 역량은 여전히 절반 수준(56.2%)이다. 기술은 날아다니는데, 기술을 향유해야 할 시민의 속도는 고려되지 않은 결과다.

특히, 무인 키오스크는 고령층에 가혹한 ‘디지털 장벽’이다. 메뉴 구조는 복잡하고, 글씨는 작으며, 결제 방식은 매장마다 제각각이다. 대기 줄이라도 길게 늘어서면 어르신들은 ‘기술 스트레스’를 넘어 자괴감마저 느낀다. 과거 직원이 수행하던 업무를 이용자에게 떠넘기면서, 이른바 ‘그림자 노동’(기술의 발달로 소비자가 직접 수행하게 된 무보수 노동)의 강요가 공공기관에서조차 비일비재하다.

이 문제를 어르신들의 ‘학습 부족’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시스템 설계 자체가 젊고 건강한 신체 인지 구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디지털 포용’은 기술의 화려함이 아닌, 가장 취약한 사용자의 눈높이에서 시작돼야 한다.

해외 사례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다. 영국은 공공기관의 모든 웹사이트와 앱이 장애인과 고령자를 위한 접근성 규정을 지키도록 법으로 강제하며, 어기면 강력한 시정 권고를 한다. 싱가포르는 더 적극적이다. 전국 각지에 ‘디지털 홍보대사’를 배치해 어르신들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무인 결제를 실습하고 보건소 앱을 사용해 보는 ‘고접촉(High-touch)’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기술이 사람을 소외시킬 때, 국가가 직접 ‘사람의 손’을 내밀어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변화 움직임이 있다. 서울시의 ‘디지털 안내사’가 구청과 지하철역을 순회하며 어르신들의 ‘디지털 막힘’을 해결해 주며, 성동구 등 일부 지자체는 로비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해 가시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혜 차원의 사업이 많고, 제도적 뒷받침은 부족하다. 이제는 행정의 ‘핵심성과지표’를 ‘디지털 전환율’에서 ‘디지털 포용률’로 바꿔야 한다. 지난 1월 22일부터 본격 시행된 ‘디지털포용법’에는 교육 지원을 넘어, 모든 시민이 행정 서비스를 이해하고 선택하며 거부할 수 있는 ‘디지털 활용권’이 명시돼 있다. 디지털이 기본값이 된 사회에서 접근성은 곧 시민의 기본권이다.

부모님이 구청 로비에서 길을 잃는 것은 노쇠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시스템 때문이다. ‘천천히 해도 괜찮다’는 문구 하나, 도움이 필요할 때 즉각 닿을 수 있는 벨 하나가 기술보다 절실한 순간이 있다. 고령자를 배려한 디자인은 결국 어린이와 장애인, 그리고 언젠가 노인이 될 우리 모두를 위한 보편적 안전망이 된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디지털 행정은 차가운 기계음일 뿐이다. 부모님의 속도에 맞춰 잠시 보폭을 줄이는 ‘사람 중심의 행정’을 보고 싶다.

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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