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기의 K스트리트 - 11월 중간선거 ‘게리맨더링’ 전쟁

 

지난해 6월 트럼프 지시로 시작… 버지니아 주민투표로 정점

공화 vs 민주 당리당략 따라 추진… 선거·민주주의 훼손 비판

인디애나는 당 반대, 뉴욕은 법원 결정에 무산되기도

워싱턴=민병기 특파원

2025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지도부를 향해 올 11월 중간선거를 염두에 두고 공화당 우세 지역인 텍사스의 선거구를 새로 짜라고 ‘지시’하며 시작된 게리맨더링(인위적 선거구 개편) 전쟁은 지난 21일 버지니아주의 선거구 재획정을 위한 주민투표로 정점에 달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무려 10개 주에서 선거구가 새로 그어졌거나 그어질 전망이다. 양당제가 고착화된 미국에서 상대를 ‘적’으로 보고 혐오하는 ‘정치의 양극화’가 선거의 공정성과 민주주의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행정부·사법부 성향 따라 확 바뀐 버지니아 선거구 획정= 버지니아주 상·하원 의회를 모두 장악한 민주당은 지난해 10월 텍사스주의 게리맨더링에 대응하기 위한 주민투표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고 11월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소속 글렌 영킨에서 민주당 소속 애비게일 스팬버거로 주지사가 바뀌며 버지니아의 선거구 획정은 탄력을 받았다. 스팬버거 주지사는 지난 2월 민주당에 유리한 새 지도를 담은 HB 29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안은 주민투표를 통과하면 즉시 발효된다. 4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압도적 반대”를 촉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21일 51.6%의 찬성으로 주 헌법 개정안이 가결됐고,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구 획정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법원이 막아섰다. 타즈웰 카운티 잭 헐리 판사는 주민투표의 문구 중 ‘공정성을 회복(restore fairness)하기 위해’라는 문구가 지나치게 유권자를 오도(misleading)했고 절차적 요건을 어겼다며 투표 결과 인증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곧바로 주 법무장관이 주 대법원에 항소해 늦어도 5월 중순에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단 대체로 대법원이 투표 결과를 인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미 1월 헐리 판사가 한 차례 제동을 건 것을 주 대법원이 뒤집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판사들의 정치적 성향도 근거로 거론된다. 헐리 판사는 판사 임명 전 공화당 후보로 주의회 선거에 출마한 이력이 있는 친(親)공화당 성향인 반면, 주 대법원은 대체로 진보 성향 우세로 분류된다. 공화당이 굳이 타즈웰 카운티에 소송을 건 것 역시 헐리 판사를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지역 언론들은 분석했다. 버지니아주 선거구가 바뀌게 되면 인구가 많고 민주당 강세인 북버지니아의 선거구가 쪼개져 흩어지며 기존 연방하원 의석 6대 5의 민주당 약우세가 10대 1의 민주당 초강세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제로섬 게임’이 되고 있는 선거구 획정= 지난해 6월부터 시작된 게리맨더링 전쟁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공수를 바꿔가며 미국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단 개편을 통한 득실 역시 ‘0’에 수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선거구 개편이 무리하게 이뤄지며 결국 주 내 다양한 유권자들의 의사가 반영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센 상황이다.

지난해 6월 뉴욕타임스(NYT)가 트럼프 대통령의 ‘게리맨더링’ 촉구 사실을 보도한 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선거구 재획정을 안건으로 한 특별 세션을 소집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정족수 미달을 노려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미국 전역으로 대피했다. 이에 텍사스 주지사는 집단이탈한 민주당 주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등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의회를 거쳐 8월 29일 애벗 주지사가 공화당에 추가로 5석을 안겨주는 새 선거구 획정안에 최종 서명했다. 미국 전역의 선거구 전쟁의 시작점인 셈이다. 10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오하이오가 각각 공화당에 1석과 2석을 추가로 안겨주는 선거구 지도를 새로 그렸다.

민주당의 반격도 시작돼 민주당 강세 지역이면서 가장 많은 하원의원 선거구를 보유한 캘리포니아가 지난해 11월 텍사스에 대응해 보복성 선거구 재획정을 위한 주민투표를 통과시켰다. 정치권에서는 대체로 텍사스에서 얻은 공화당의 5석을 상쇄할 수준의 선거구 획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버지니아에서 선거구 획정이 이뤄지는 기류가 형성되자 다시 공화당 우세인 플로리다의 론 디샌티스 주지사가 나서 28일 의회 특별 세션을 열고 선거구 획정 시도에 나선다. 이미 플로리다는 2024년 선거구 획정을 통해 공화당에 크게 유리한 선거구를 만들었지만 민주당 강세 지역인 올랜도와 탬파 인근 선거구를 더 쪼개서 공화당에 1∼2석을 더 확보하려는 계획이다. 텍사스(공화), 캘리포니아(민주), 버지니아(민주), 플로리다(공화)로 이어지는 ‘도미노’ 선거구 획정은 결국 미국 선거구 시스템을 당리당략에 매몰된 당파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내부 온건파’와 법원에 막히기도= 모든 주에서 이 같은 당리당략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디애나주다. 지난해 12월 주 상원에서 민주당 의석 2석을 없애는 ‘공격적’인 선거구 획정안이 부결됐는데, 21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연방 정부나 특정 정치인이 주의 고유 권한에 개입하고 위협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민주당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의원을 향해 ‘낙선 운동’까지 예고했지만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뉴햄프셔에서는 공화당 크리스 서누누 주지사가 “유권자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권을 행사했고, 캔자스주에서는 공화당이 민주당의 유일한 의석인 샤리스 데이비스 의원의 지역구를 쪼개려 했지만 온건파 의원들의 이탈로 실패했다. 뉴욕주에서는 민주당이 재획정을 시도했지만 뉴욕주 대법원과 연방대법원이 차례로 “이미 획정된 지도를 선거 직전에 당파적 이유로 고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게리맨더링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마이클 리 브레넌 정의센터 연구원은 “보복성 재획정의 패자는 미국 유권자들”이라며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권익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지도’(Maps designed for politicians)를 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병기 특파원
민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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